2008년 4월 4일 금요일

<시칠리아의 암소, 한줌의 부도덕> 중에서...

언젠가 우연히 '전대협 동우회'에서 펴낸 [전대협 6년사-불패의 신화]라는 책을 읽었다. 역대 전대협 의장이 자신들의 투쟁기를 무협지 형식으로 엮은 책인데, 그것을 읽고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거기서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이들의 낮은 지적 수준, 의심스러운 도덕의식과 촌스런 미감이 아니었다. 그 역사(?)를 서술하는 관점이 철저하게 전체주의 국가를 지배하는 노멘클라투라들의 그것과 닮았기 때문이었다. 작은 수령들의 활약에 대한 자화자찬, 이들을 보위하는 대중들의 헌신적인 투쟁에 보내는 공치사, 그리고 이 충성스런 대중들에게 작은 수령들이 베풀어준 은총에 관한 미담...... 그나마 의기소침한 진보세력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 썼다는 그 가상한 집필 동기도, 이들이 자기들끼리 그룹을 지어 기성 정치권을 기웃거리고 있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믿을 수 없었다.

작년엔가, 우연히 그 중 한 사람을 베를린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그는 내게 자기들이 '진보세력의 정치적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고 얘기했다. 나도 참 순진한 것이, 이 말을 듣고 이들이 진보정당을 준비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임수경 씨가 "NHK 가라오케바로 오라"는 말을 듣고 "NHK와 기자회견을 하나 보다"하고 순진하게 생각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도대체 5월 18일, 광주에 내려가 가라오케 기계 앞에서 즐겁게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임수경 씨에게 도저히 이해가 안 되듯이, 평범한 386세대의 사전에 따르면 "진보세력의 정치적 진출"이란 어느 경우에도 기성정당에 입당하는 것을 의미할 수 없다. 그것을 의미하려고 했으면 다른 어휘를 사용했어야 한다. 나는 이게 매우 불쾌하게 느껴진다. 하긴 "애들을 다룰 때는 처음엔 조지고 다음에는 얼르라"고 버젓히 말하는 그 분께 애당초 너무 큰 기대를 했는지도 모른다. 이 분이 언젠가 다시 "조지"고 "얼르"는 고귀한 위치에 올라가기 까지 윗분들께 '비비고 기는'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아야 할까?

이들이 운동과정에서 맺어진 인간관계를 이제까지 유지하며 결속을 해왔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진보세력의 정치적 진출을 위하여? 이들이 자기들의 운동경력을 '불패의 신화'로 찬양한 동기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진보세력에게 자긍심을 주기 위해서?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의 얘기를 들었다. 독일에서 68세대를 연구하는 386세대의 여학생인데, 어느날 한국에서 '세대론'에 관한 책을 낸다고 원고를 써달라는 연락이 왔단다. 이 여학생에게 68세대를 연구한다는 것은 아마도 결코 잊혀지지 않을 과거의 트라우마를 심리적으로 극복해내는 의미를 가질 게다. 그런데 정작 그 책이 나온 다음에 알게 된 것인데, 그 책의 출간 주체가 바로 기성정당에 입당을 노리던 그 그룹이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그의 논문이 이 아이들을 정치권에 상품으로 내놓기 위한 포장지로 사용되었다는 얘기다. 왜 굳이 이렇게 해야 하는가? 선거철만 되면 부랴부랴 괴상한 저서들을 내놓는 기성 정치인들과 대체 뭐가 다르단 말인가?

공사의 구별도 없는 모양이다. 예컨데 이 애숭이들이 금배지를 달 수 있었던 것은 검증될 기회조차 없었던 그들의 정치력 덕분이 아니라, 전적으로 '모래시계 세대의 대표'러눈 상징자본 덕분이었다. 어떤 이는 그게 다 자기의 능력 덕분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대범함을 과시하는데,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보라. 아무리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고 해도 어느 정당에서 미쳤다고 특정한 직업이 없는 백수들에게 공천을 주겠는가. 기성정당에 들어간 사실 자체를 문제삼는 게 아니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기에, 누구든 자기가 원하는 정당에 가입할 권리가 있다. 설혹 그것이 썩어빠진 기성정당이라고 하더라도 거기에 입당하는 것 자체는 벅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아무 문제도 없다. 문제는 입당을 하는 방식이다. 즉 기성정당에 입당하려면 철저히 개인 자격으로 했어야 한다. '모래시계 세대'의 '신화'를 조작해가며 한 세대의 상징자본을 몽땅 챙겨 튀는 방식이 아니라......

이왕 우리 세대의 상징자본을 활용해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았다면 적어도 사후(事後)에라도 그 상징의 격조에 걸맞게 처신을 해야 할 것이다. 경위야 어쨌든 그 상징을 한번 제 것으로 내걸었으면, 되도록 그것을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것이다.


<시칠리아의 암소, 한줌의 부도덕>, 진중권, 다우 pp32-34


ps. 거의 8년이 지난 지금 읽으니 참 다른 맛들이 많이 느껴집니다...

댓글 1개:

  1. trackback from: 시칠리아 암소(진중권) - 생각 똑바로 함시롱 살아라.
    시칠리아 암소는 진중권이 여러 매체에 쓴 글들의 모음 책이다. 진중권이 요즘처럼 유명세를 타기 이전에도 사회,정치,문화 각 분야에 강한 말빨로 자기의 의견을 어필하는 논객으로 유명했다. 그 때부터 진교수가 쓴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미학 오딧세이', '시칠리아 암소'와 같은 책들을 보고 싶은 마음은 넘쳐났었다. 하지만, 정치, 사회에 대한 관심보다는 나 자신의 영달을 위해 먹고 살는데 관련된 재테크, 자기 계발서만 보다보니 구입할 기회가 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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