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3월 10일 월요일

중국 진출 기업들이 직면하는 숨겨진 문제.

공산당은 나쁜 것, 그냥 적... 뭐 대충 그런 식으로 보시는 분들은 사회주의 국가들이 앞장서서 외자유치에 나서고, 사회주의라기 보단 자본주의적인 형태로 자신들의 사회체제를 바꿔가는 것을 보고 자본주의의 승리라고 마냥 뿌뜻해 하시더군요.

글쎄요... 한 사회가 어떤 이념을 선택하느냐의 문제는 사실 그 사회가 어떤 정치세력을 선택했느냐의 문제로 봐야 하는게 아닌가 싶은 입장에서 보자면... 이런 시각들은 나이브 하기 그지 없다고 봅니당. 사실 인과관계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하구요.

이런 이념이라는 선글라스로 세상을 바라보던 시절, 그러니까... YS때까지도 안기부가 기획을 하고 전경련이 돈 대줘서 전국의 대학 학생회 간부들을 중국 관광을 시켜줬던 적이 있었습니다. 목적은 좀 빤했죠. "너희들이 말하는 사회주의가 그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도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그걸 계속 이야기할래?" 뭐... 대충 이런거였거든요.

물론 학생운동이 맛이 가면서 부턴 이런 호사도 동시에 없어지긴 했었습니다만... 중국현대사를 살펴보다보면... 이들이 왜 홍군을 지지했는가... 그리고 흑묘백묘를 이야기한 덩 샤오핑의 집권이 어떤 경로로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전혀 다른 해답들을 얻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마오쩌뚱을 붉은 중국을 세운 사람 정도로만 알고들 있으며 덩 샤오핑과 같은 테크노크라트들과 적대적인 관계만 유지했다고 이해하죠. 하지만 마오가 자기 아들까지 희생시키며 한국전쟁에 이른바 '의용군'을 파병(국가적으론 파병이었지만, 자발적으로 간 거니까 자신들과 직접적인 상관은 없다...는 눈 가리고 아웅했죠)해야 했던 이유들을 살펴보면... 이 나라의 지도부가 경제발전을 얼마나 갈망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나름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것을 하고 국민당을 대만으로 쫓아내는데 성공하자마자 중국 지도부가 직면하게 되었던 상황은 기근이 들어 수십만명이 굶어죽는 사태였습니다. 어서 사회주의적 경제 발전을 이룩해야 한다고 똥끝이 타들어오는 상황이었던거죠. 그래서 스탈린에게 사회주의적 경제 개발을 위한 지도원들을 파견해달라고 하는데... 스탈린 입장에서 보자면 '농민이 주도하는 중국식 사회주의'라는게 아무래도 짝퉁 같아 보이는 겁니다.

소련에서 여하간의 지원을 하기 시작했던 것두 마오가 자신의 아들까지 잃고, 수십 수백만명의 중국인들이 한국전쟁에서 목숨을 잃고 나서부터였죠.

그것도 제대로 기술전수 같은 걸 해줬냐...면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대부분 와서 중국의 현실을 비웃기에 바빴었죠. 중소국경갈등 등을 '공산주의자에겐 조국이 없다'는 공산당 선언이 실제와 사맛디 아니한 사례 정도로 해석하는 걸 외우라고 가르치던 우리의 윤리교과서와는 달리, 실제 갈등의 원인은 이 과정에서 나름 대국이라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중국인들의 자존심이 시궁창에 처박혔기 때문이었죠...

문화대혁명(이라고 쓰고 문화대동란이라고 읽습니다. ^^;;)조차도 사실 마오가 나름 경제 발전을 위해 추진했던 대약진 운동이 대재앙으로 끝나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났고... 그 권력을 다시 찾기 위해 벌였던 엽기 행각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면... 덩 샤오핑의 흑묘백묘 그 훨씬 이전부터 중국 공산당 지도부에게 경제 성장이라는 것은 핵심적인 문제였습니다.

이경숙 전 인수위원회 위원장이 미국 유학을 갈때 숙명여대 교직원들이 김포공항까지 가서 환송을 해줬다죠. 그런 압박감을 가지고 미국에 유학갔는데 오린쥐 하나 슈퍼에서 사질 못했으니 얼마나 갑갑하셨겠습니까? 70년대 말 유럽의 캠퍼스를 접수하기 시작했던 중국산 유학생들은 한 대학의 교직원들이 아니라 '당'에서 보내줬던 이들입니다. 이들이 얼마나 절박한 심적으로 공부하고... 또 조국으로 돌아가 뭘 어떻게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을지 짐작가는 바가 없으신가요? 나이브한 서방 시각으론 "쟤네들 망명하면 우짠다냐?"라고 물었을때 이들은 "우린 인구가 많아서 몇 명 토껴도 상관없어"라고 대답했지만... 정작 가서 공부하는 이들은 '조국 경제를 새롭게 건설하기 위한 중대한 사명을 안고' 공부하러 갔던 것이었으니... 망명은 이들의 안중에도 없었죠. 중국 공산당도 이걸 잘 알았구요.

이런 성과들이 실제 쬐끔씩 시작했던 것이 1980년대였고... 그 성과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지 벌써 2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올해는 북경 올림픽이 있죠. 그들이 좋아하는 숫자 8이 연달아 세 번 반복되는 날로 개막식을 잡았다죠... 그들에게 이번 올림픽은 그냥 세계인의 스포츠 축제라기 보단... 그 절치부심의 세월동안 자신들이 쌓아올린 것을 세계 만방에 선포하는 초특급 이벤틉니다.

얘네들의 이런 사정에 대해 우린 과연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요?

중국 진출 중소기업들, 대부분이 저임금을 바라보고 들어갔었죠. 뭐 최근엔 "10억에게 신발을 팔아도 그게 어딘데?"라는 분들이 들어가셨습니다만... 자신들이 내심 경멸해 마지 않는 까오리팡즈(원랜 고구려인, 고려인을 칭하는 말인데 우리가 가끔 짱께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용도로 쓰임다)들이 그동안 깝쭉거렸던 것을 pay back하겠다고 하고 있지 않을꺼 같으셨나요?

사실 이런 정황에 대해 가장 정확하게 파악하고 대비했어야 하는 분들이 불과 10여년 전까지 '사회주의 조또 아니라는거 좀 배우고 와라'라고 대학생들 관광 보냈던 분들이었는데... 뭐 우짜겠습니까. 남의 나라의 상황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페널티를 중국에 공장 차린 중소기업인들이 가장 먼저 받는 것일 뿐이죠.

명색이 사회주의 체제에서, 그리고 극심한 빈부격차로 최악의 경우엔 흙을 먹고 살던 이들의 지지가 있어서 집권했던 이들이... 내수 경제의 크기를 키우겠다고 나서는 것은 당연한 경로였을 겁니다. 싼 인건비가 결코 싸지 않은 인건비가 되고, 더불어 최근의 원자재 난까지 겹쳐지게 되니... 현지에 진출한 중소기업들로선, 더군다나 이익율을 대기업들에 가져다 바쳐야 하는 것과 다름 없었던 최근의 상황들을 보면... 견디기 어려웠겠죠.

그럼... 이게 언제 모든 기업들로 연결되어 갈까요? 아마... 그게 2MB 정부의 명운을 가르는 시점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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