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3월 31일 월요일

각하, 각하라는 호칭이 맘에 안드시는 건가요?

일산에서 엘리베이터에서 아이를 납치하려고 했던 범인이 잡혔다는 뉴스를 방금 봤습니다. 현장에서 쪼인트 한 번 날리니까 확실히 움직이는 속도가 다르다고... 조선 것들은 조져야 말을 듣는다고... 혹시 그런 생각하시면서 잠자리에 드실껀가요?

글쎄요... 전 각하의 모습을 보고 사고친 최전방 GP 초소장인 소위의 쪼인트를 까기 위해 군단장이 헬기타고 간 것 같다는 생각밖엔 안들었습니다.

뭐 당장 사건은 해결되지 않았냐구요? 물론 그렇겠죠. 하지만 그게 과연 일산경찰서의 자원만으로 해결된 것일까요? 장담컨데 경기지방경찰청의 모든 자원들이 다 투입되었을 겁니다. 물론 일산경찰서장님은 지금쯤 오만가지 생각을 다 하면서 사표를 쓰고 계실꺼구요.

어느 조직이든 사실은 지독하게 제한된 자원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투입하느냐는 것이 조직운영을 맡아본 사람이 항상 고민하는 내용입니다. 각하와 같은 방식이 통하는 것은 사실 순간일 뿐이죠. 왜냐면 인간은 하루 8시간은 쉬어야 하는 존재며, 기계와 달리 몇 끼의 식사 중단만으로도 이전의 효율을 낼 수 없는... 복잡한 유기체니까요.

더군다나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하는 존재입니다. 요즘 제가 재미있고 보고 있는 초난감 기업의 조건이라는 책에서, 성공한 기업들은 남들은 반복하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남들은 확대 재생산하는 실수를 수습하는 기업들이라고 이야기하더군요. 왜냐면 실수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인간 학습의 과정이기 때문에...  

예... 일산경찰서의 문제가 되었던 그 사건은 "실수"라기 보다는 은폐에 가까운 행동이었습니다. 이른바 복지부동이라고 하는 고질적인 문제가 드러난 사건이기도 하죠. 하지만 이런 "복지부동"이 나타나는 조직들은 어떤 조직들이 대표적인지 아시나요? "하나의 실수"를 조직이 반복하지 않도록 학습으로 공유하는 조직이 아니라 처벌하는 조직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조직들은 대체로 같은 잘못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경향을 가집니다. 학습하지 못했으니까요...

더 큰 문제는... 제가 40살 가깝게 살아오면서 각하께서 일선 경찰서장을 깨러 간 것과 같은 방식으로 움직이는 조직은 딱 두 가지 형태 밖엔 보지 못했다는 겁니다.

하나는 우리 북쪽에 또아리 틀고 있는 양아치 집단입니다. 심심하면 시비거는 그 동네의 뽀글머리 아저씨가 "현장지도"라는 이름으로 벌이는 행각들이죠. 우리의 지도자는 역시 대단하셔~라는 이야기가 그 자리에서 나올지는 모릅니다만... 조직운영을 이렇게 하면 현실과는 사뭇다른 결과물들을 보고받게 됩니다. 지금 그 북쪽에서 매년 식량생산량, 전기 생산량들을 제대로 수치화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또 하나는 제가 영화로만 본 조직들입니다. 뭐 God FatherGoodFellas같은 영화들이었습니다. 단체 소속원들은 거의 10년전에 부산 해운대에 살때 온 몸에 용 무늬, 호랑이 무늬를 장식한 형태로 들어와 시끄러웠던 온천탕을 일제 침묵 상태로 만들어버리던 형태로 밖엔 보지 못했구요... ^^;;

이 조직들은 말단 관리자가 삽질을 할 경우 시멘트 공구리에 묻어버리거나 무거운 걸 달아서 바다에 던져버리더군요.

솔직히... 오늘 각하의 행동은 이 두 조직들과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게 만들어버리시더군요. 혹시... 각하라는 칭호 대신에... 위대한 지도자... 혹은 보스... 뭐 이런 걸 더 좋아하시는 건가요? 그럼 제가 크게 잘못하는 것이겠지만... 또 그건 아니신거 같기도 하거든요? 도대체 왜 그러신건지 설명 좀 해주셨으면 합니다요...

이 기사를 아무리 뜯어봐도 전 이해가 안되었거든요... --;;

서해에서의 무력충돌이 우려되는 이유들...

육상에서 치고받고의 형태로 일이 진행된다고 한다면 전면전이고, 이건 양쪽다 괴멸적 타격들을 겪을 수 밖에 없습니다. 뭐 북한 양아치들이 화생방전을 벌일 가능성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만... 이건 제가 알고 있는 군사적, 물리적 상식으론 논외라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포탄은 화학탄을 날릴 수 있지만 미사일의 경우엔 요게 가속도 때문에 좀 문제가 많거든요. 특히나 광주를 겨냥하고 쏴도 그게 황해 앞바다에 떨어질지 부산 앞바다에 떨어질지 알 수 없는 노동 시리즈라면 더 말이 안된다고 봅니다. 생물학전의 경우도 테러의 형태로 사회교란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면 말이 됩니다만... 정식 포탄이나 미사일과 같은 형태로 날리는건 북한의 기술력으론 좀 어렵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북한의 공격이 치명적일 수 밖에 없는건... 상대적으로 짧은 거리라 원형공산오차가 줄어들 수 밖에 없는 지역에 대한민국 경제의 대부분이 몰려있다는거죠. 그것도 LCD, 반도체와 같이 한번 뽀게져 다시 짓는데 걸리는 시간이면 세계 시장에서 지금 가지고 있는 마켓 쉐어를 다시 따라잡기란 심히 난감한 물건들을 만들고 있는 동네라... 복구자체가 어렵다고 봐야하거든요.
 
뭐 한국전쟁 당시의 트라우마 때문에 북쪽 양아들이 기습할 경우엔 어떻게 할 것이냐... 뭐 그런 이야기들도 하는데요. 요것도 좀 상관이 없습니다. 기습할 경우, 리베르타 법칙 혹은 란체스터 제2법칙이라고 하는 넘이 더 효과적으로 발휘될 수 있거든요.

이 법칙, 간단하게 설명하면 "그룹간의 공격력=양의 제곱X질의 제곱"이라는 겁니다. 모든 조건들이 동등하다고 한다면, 즉 질의 차이가 없다고 한다면, A군이 B군보다 수적 우위에 있을때 A의 생존자는 A제곱-B의 제곱이고 B는 0이 되거든요. 100과 60이 붙었다고 할 경우, 100에서 40이 살아남는게 아니라 100의 제곱-60의 제곱으로 60은 전멸하고 100은 약 20명 정도가 죽거나 다치게 되는데... 기습은 이 효과가 더 크게 나타나게 되죠.
 
요것만 보면 우리가 밀릴 것 같은데...또 다른 문제는 우리군과 북한군 사이에 상당한 질적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밀리터리 매니아라고 하면 1차 이라크전(사막의 폭풍작전) 당시 73이스팅 전투의 사례들을 모두 알고 있을 겁니다. 숫적 차이가 절라리 많이 나는 상태로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의 T-72탱크와 미군의 에이브럼즈 M1A1이 붙었는데... 결과는 이라크 전차 12대가 골루 가는 동안 미군 전차 한 대가 골루 갔거든요. 그것도 이라크 전차 때문이 아니라 미군끼리의 오발사고 때문이었습니다.
 
북한군 주력전차인 천리마(T-62)는 이라크 공화국이 썼던 넘이랑 반세대 정도 차이가 나고, 우리의 K1전차는 미군 M1A1과 역시 반세대 정도 차이를 보이거든요. 이거 모르는 북한이 아닌 담에야 끝짱을 보겠다고 밀고 내려오는 건 아무래도 어렵다고 봐야겠죠.
 
반면 서해에서의 무력충돌 가능성은 쫌 이야기가 다릅니다. 그리고 실제로 긴장의 수위를 높이고 있는 지역도 서해구요. SS-N-2(나토 코드 스틱스, 중국산 카피의 나토코드는 실크웜)를 며칠 전에 세 발 쐈었던 지역이자... NLL무효 이야기가 다시 나오기도 하는 거... 북한이 믿고 까불만한 현실들이 좀 있거든요.
 
첫 번째는 첫 번째 교전에서 투입할 수 있는 타격무기의 우위가 북쪽 양아들에게 있다는 겁니다. 우리의 경우에 F-16정도가 공중초계를 하고 연평도 해병대에 비상걸고... 뭐 그런다고 하더라도 바다에서 북쪽과 처음 부딛히게 되는 거이 참수리 경비정이라는거거든요. 2차 서해교전 당시 국회에서 공개되었던 자료들 중에 좀 치명적인 것은 우리의 구축함이 그물 때문에 빨리 접근할 수 없었다는 점이었죠. 실크웜 자체가 60년대 기술로 만들어진 넘인데다가 동구권 무기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전자통신기술의 한계 때문에 제밍에 약하다고 하더라도 이걸 떼거리로 퍼부으면 답이 좀 안나옵니다. 작년 7월에 진수된 윤영하급이 실전배치된 상태라고 한다면 이야기는 쫌 많이 달라집니다만...
 
두 번째는 자기들이 쎄게 두들겨 맞을 경우에 말려줄 큰형님이 있다는 겁니다. 육상의 경우 북한이 우리 군에 의해 초토화된다고 하더라도 중국이 조중군사동맹에 의해 달려오는데에는 시간이 쬐끔 많이 걸립니다. 땅덩어리가 워낙 큰데다가 이동수단은 제한되어 있으니까요. 하지만 바다의 경우엔 이야기가 아주 많이 다릅니다. 왜냐구요? 중국의 3대 함대 중에 하나인 북해함대의 나와바리가 바로 서해거든요. --;;;
 
거기다 동해함대와 남해함대까지 가세해 우리의 해상무역로를 살포시 눌러만 줘도 한국경제는 비명을 지를 수 밖에 없습니다. 석유 먹는 하마중에 하나인 대한민국에서 석유수입이 제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더군다나 전략비축유를 40며칠 치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교전상황에서는 소모속도가 클 수 밖에 없으니... 짜증만방으로 나는 사태가 될 수 밖엔 없거든요.

이것만으로도 좆 같은데 세 번째가 또 걸립니다. 우리 수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중국에서의 상황이 험악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러시아가 그쪽으로 붙어버릴 경우, 지역에서의 완전한 고립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중국의 대한민국 침공과 같은 일은 북한의 생화학 미사일처럼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보지만... 우리가 받는 타격의 수위가 장난이 아니게 되거든요.

아마 2MB 아저씨네들은 미국에 달려가서 뭐 어떻게 해보겠다고 덤비겠지만... 그렇게 되면 더 등골 뽑히는 사태로 이어질 겁니다. 미국의 유일한 우방인 영국, 핵무기까지 같이 개발하고 서로 주고 받는 우방은 미국과 영국 뿐이죠,이 2차 대전 당시에 미국에게 내줬던 것들에 버금가는 것들을 내줘야 사태 봉합이 될거니까요.
 
이런 현실들을 되돌아보면 지난 10년간 쌓아왔던 관계들을 몽땅 다 청산하겠다고 덤비는 2MB아저씨에게 충분한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해볼만 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거죠. 더 지랄은... 사태가 이렇게 흘러간다고 한다면 정치판도 심히 좆같아질거라는 겁니다. 주석궁에 탱크 밀고 올라가자는 조갑제 영감님 같은 양반들의 목소리가 더 커질 수 밖에 없는 상태가 되는거니까요.

2008년 3월 29일 토요일

서해교전 vs 종교적 신념에 따른 집총거부

이전의 블로그에 올려놓았던 글입니다...만... 음... 좀 다른 이야기들도 접하게 되니 이 글에 연결해서 붙여놓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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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양심적 병역거부"는 지금까지 "종교적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 혹은 "집총거부"가 올바른 표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양심적'이라는 형태의 수사를 붙이는 이유는 그것이 가지는 정치적 의미로 시민사회에 문제제기를 제대로 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되는 것이죠. 어떤 말이 어떤 의미로 전달된다는 것에 비교적 정통한 사람이 만들어낸 말이고... 지금까지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회적 합의'와 관련해서는 참... 복잡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91년에 군에 끌려갔었을때(데모하다가 신세 조지거나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아버지께선 요로에 있는 모든 라인을 가동하여 아늘네미 군대보내는데 걸리는 시간을 딱 3개월로 맞춰버리시더군요. 저 신검부터 영장까지 딱 3개월 걸렸었슴다. --;;) 가족들과 빠이빠이 하고 나서 입영기념으로 한참을 굴리더니만 부대장 아저씨가 제일 먼저 물었던 것은 "여기 여호와의 증인 없나?" 였습니다.

두넘인가 나갔고... 존나 두들겨 맞은 담에 헌병대로 곧바로 끌려갔죠. 훈련기간동안 그들에 대한 관심을 가질 만큼의 정신적 여유도 없이 지나갔었습니다만... 한겨레21인가에서 지금까지 그들이 수십년동안 최소 3년 이상의 집행유예 없는 실형을 받아왔다는 사실에 대해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념적 병역거부를 제한적으로 인정한다고 해도 대한민국은 괜찮다"는 말을 선언적으로 하기엔, 군대와 관련해서 이 나라의 남자들이 가지고 있는 집단적 트라우마의 상흔은 장난이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언젠가 Kyrie의 동거인과 술 먹으면서 나왔던 이야기입니다만... 연평해전에서 부상당한 병들의 치료를 담당했던 한 군의관이 올려놓은 글은 이게 결코 선언적으로 이야기될 부분이 아니라 대단히 정밀한 형태의 사회적 합의로 가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 보신 분들도 있겠지만... 일독을 권하는 의미에서 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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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주엔가 Samuel과 산하랑 술마시다 제도에 의한 죽음에 관해이야기할 때 제가 인용한 글입니다. 지난해 6월말 연평해전에서 북한군의 공격에 의해 중상을 입고 치료를 받다 결국 세상을 떠난 사병을 치료한 군의관의 수기입니다. 처음 이 글을 읽으면서 정말 많은 생각을 했고 어떤 죽음이든간에 그 억움함과 슬픔의 감정의 경중을 따질 수 없겠지만 이 죽음은 그 어떤 죽음보다 큰 함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효순,미선이의 죽음"이 정치적 죽음이 된 반면 이 병사의 죽음은 제생각에는 "군복을 입고 죽었다는 이유"로 뉴스의 한귀퉁이에서 흘러갔을 뿐입니다. 제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자신의 탄생고 함께 부여된 국방의 의무라는 이름으로 징발된 병사의 죽음, 게다가 동족이라는 북한군의 선제공격에 의해 죽어간 병사들의 죽음은 한번쯤 확실한 단계를 밟고 지나갔어야했다는 생각입니다. 미군 장갑차에 의한 죽음도 억울하고 치가 떨리기 한이 없지만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제도가 가져다 준 "같은 민족"이라는 북한군이 가져다준 죽음은 그 이상의 슬픔과 분노를 불러일으킵니다. 여중생 사망사건 일주기를 기념하고 여러가지 행사가 진행되었지만 "죽어간 젊은 청년"들을 기억하는 것은 아마 대전 현충원을 찾은 주위분들이 대부분이겠죠. 우울한 날만큼 가슴이 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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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6월 29일 토요일. 나는 터키와의 월드컵 3, 4위전을 앞두고 축제 분위기 끝물의 애틋함이 괜히 섭섭해서 이런저런 월드컵 이야기를 동료들과 노닥거리며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웬걸, 갑자기 구내방송이 나오고 어수선한 분위기…. 이윽고, TV에서는 연평도 앞바다에서 양측 해군 간에 교전이 있었다는 보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국군수도병원 전 군의관을 비롯한 장병들은 퇴근을 미루고 대기상태로 남겨졌고,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보낸 후 헬기를 통해서 환자들을 후송 중이라는 소식이 들리는 가운데 필요 인원만 남기고 나머지는 퇴근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그날, 외과계 군의관들은 입대 이후 미증유의 수고를 했음은 물론이다. 내과 군의관들을 찾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귀가한 나를 아내와 뱃속의 아기가 반겼다. 점심식사를 하며 흘깃거리던 TV화면에는 사망자를 비롯해서 많은 부상자들이 발생했다는 뉴스가 흐르고 있었다.

다음날인 일요일 아침. 만삭인 아내와 함께 아침식사를 하던 나는 병원에서 온 전화를 받았다. 어쩐지 쉽게 퇴근할 수 있었던 것이 찜찜하더라니….

‘내과를 찾을 일이 뭘까?’

이유인즉, 경상자 중에서도 배의 화재로 인한 연기로 폐 손상을 입은 환자들이 있어서 내과 군의관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출근한 뒤 들어선 중환자실의 분주함은 수도병원 근무 후 처음 접하는 광경이었다. 응급수술을 마치고 누워있는 중상자들이 즐비했고 팔다리를 잃은 장병들도 눈에 띈다. 콧등이 시큰거렸다. 평화로운 대한민국에서 이게 웬 난리인가. 저 창창한 청춘들을 어찌 하라고….

화재에 의한 흡인손상이 의심되는 환자들을 봐주고 담당배정을 한 후 내 환자인 오중사의 몸에 박혀 미처 제거되지 않은 파편과 총알조각들을 손닿는 대로 마저 빼냈다. 14mm 기관총 탄두가 깨진 채로 등 뒤를 뚫고 들어가 방광을 찢고 사타구니 근처의 피부 밑에 묻혀 있었다. 피부를 절개하고 탄두를 끄집어내니 반 동강이 난 것이 어딘가에 부딪힌 후 튀어 들어간 듯 했다. 그나마 경상 축에 속하던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사뭇 처절했다.

북방한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계속 내려오는 북쪽 배를 가로막고자 참수리 357호는 배의 옆구리로 적선의 진로를 막는 ‘차단기동’을 하고 있었다 한다. 차단기동이 무시무시한 이유는 서로 간에 배의 옆구리를 고스란히 노출시키게 된다는 점이다. 이건 피차간에 절대 공격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으니….

남하하던 북측 배가 방향을 틀며 옆으로 도는 순간 우리 장병들의 눈에는 포탑을 돌려 조준하고 있는 인민군들이 보였다. ‘어, 쟤네들 왜 저래?’하는 순간 적의 85mm포가 불을 뿜었고 무척이나 가까이 붙어 있던 우리배의 함교(조타실)가 명중당했다. 이후 우리의 포탑들이 차례로 가격 당했다. 이때 함교와 포탑에 위치하던 장병들이 전사했다.

우리와 같은 전자조준장비도 없이, 수동으로 조준하는 북쪽 함정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우리를 노리고 미리 공격계획을 가진 상태에서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중앙 통제실인 함교가 무력화되고 대응 사격할 수 있는 포탑들이 날아간 상황에서 어려운 전투를 벌이게 됐고, 유명한 이야기지만 권모상병 같은 경우는 왼손이 날아간 상태에서 오른손만으로 M60 기관총을 발사하는 투혼을 보였던 눈물나는 전투는 이렇게 시작됐다.

더욱 황당한 것은 피격당한 참수리 357호가 당하고 있는 동안 급히 접근한 참수리 358호에서 북측 경비정에 포탄을 퍼부어댔지만 그 상황에서도 북측 경비정은 오로지 357호만 공격했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더 위협적인 상대를 먼저 공격해야하는 것이거늘, 침몰시키겠다고 작정을 했던 모양인지 ‘난 한 놈만 패’식의 공격에 의해 357호는 결국 가라앉아 버린다. 당연히 북측 경비정은 옆에 있던 358호에 의해 신나게 두들겨 맞아서, 침몰되는 것만 겨우 면하고 퇴각하게 됐고 이후 들리는 이야기로는 북측 사망자만 30명 이상이라 한다. 같은 민족끼리 내가 더 많이 죽였네, 겨루는 것은 또 다른 비극이지만, 그래도….

그렇게 오전을 보낸 가운데 오중사의 맞은 편 침상에서 생존자중 가장 많이 다친 박 상병을 접하게 된다. 건장하고 준수한 청년이었는데 의식은 없었고 인공호흡기가 달려 있었으며, 내가 군대온 이래로 목격한 가장 많은 기계와 약병들을 달고 있는 환자였다. 파편이 배를 뚫고 들어가서 장을 찢었고, 등으로 파고 들어간 파편은 등의 근육과 척추에 박혀있었으며, 등과 옆구리는 3도 화상으로 익어 있었다. 오른쪽 허벅지에도 길쭉한 파편이 박히고, 전신에 총상과 파편창이 즐비했다.

“쟤는…, 왜 저렇게 다쳤어요?”

옆 침상에 누워 있던 부정장 이중위가 입을 열었다. 그는 포탄에 맞아 왼쪽 발목이 부서져 절단술을 끝낸 상태였고 그 옆에는 한참을 울었는지 눈이 발그레 부어오른 젊은 아가씨가 앉아 있었다. 약혼자란다.

“우리배의 의무병 녀석인데 부상자들 처치한다고 몸을 아끼지 않고 뛰어다니다가 그랬습니다….”

참수리 357호의 의무병이었던 박상병은 첫 포탄에 조타실이 깨지면서 파편에 쓰러진 정장 윤영하 대위를 몸으로 덮고 함교 계단 아래로 끌고 내려가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으나, 방탄조끼 밑으로 줄줄 흐르는 핏물을 보며 소용없음을 깨닫고는 다시 나가 쓰러지는 전우들을 치료하기 위해 몸을 숨기지 않고 뛰어다녔다. 당연히, 총을 쏘는 전투병은 엄폐물에 몸을 숨긴 채로 사격을 하게 마련이지만, 부상병을 찾아 이동해야하는 의무병은 전투 시 가장 위험한 처지에 놓이는 것이다. 총탄에는 눈이 없다.

이야기를 듣자 울컥했다. 멋진 놈…. 그런데, 이게 뭐냐.

상태는 굉장히 안 좋았다. 출혈이 엄청나서 후송당시부터 쇼크 상태였고, 수술하는 동안에도 엄청난 양의 수혈이 필요했다. 정형외과와 외과 군의관들이 달려들어 가능한 대로 파편과 총탄을 제거하고, 장루를 복벽으로 뽑고, 부서진 오른쪽 허벅지의 혈관을 이어놓은 상태였다.

엄청난 외상으로 인한 전신성 염증반응 증후군(SIRS)으로 인해 혈압이 쉽사리 오르지 않아 결국, 순환기내과 전공인 나도 박상병과 인연을 맺게 된다. 스완갠쯔 도자를 삽입하고 수액과 승압제로 혈압을 힘겹게 유지해 나가는 가운데, 후송 시부터의 쇽에 의한 급성 신부전 때문에 신장내과 동료도 힘을 합해 혈액투석을 지속했고, 외상성 ARDS가 속발해 호흡기내과 동료도 합류한다. 방광손상이 발견돼 비뇨기과 동료도 합세하고, 부비동에 문제가 생겨 이비인후과 군의관도 손을 더했다. 건장했던 박상병은 다행히도 질긴 생명력을 보여주었고, 그 가운데, 나는 테니스 친구, 술친구들에 다름 아니었던 동료군의관들이 실은 대단한 의사들이었음에 새삼스러워했다.

‘너는 반드시 살려낸다!’

박상병의 숭고했던 행동을 여러모로 전해들은 우리 군의관들은 암묵적으로 동감하고 있었다. 이기심으로 질펀한 세월을 뚫고 오면서 형편없이 메말라 버린 내 선량함에 박상병의 회생은 한통의 생수가 되어 줄 것만 같았다. 뭔가 해줄 수 있다는 것…. 레지던트 기간 동안 수없이 지새워냈던 하얀 밤들과 바꿔낸 중환자관리의 기술이 너무나도 기꺼웠다. 하지만, 감염부위에서 녹농균과 메치실린 내성 포도상 구균이 배양되면서 소위 항생제의 마지막 보루라 일컬어지는 이미페넴, 반코마이신, 아미카신으로 배수진을 치게 됐다.

오르내리는 체온에 일희일비하는 가운데 전신상태는 조금씩 호전되고 있었지만 오른쪽 다리가 서서히 차가와지며 색이 죽기 시작했다. 부서졌던 혈관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결국, 고관절부위에서 절단이 이뤄졌고, 사타구니 아래쪽 오른다리는 그렇게 사라졌다. 사지 손실이 감정적 아쉬움에 그치는 사건은 아님을 누구나가 알고 있었지만, 다른 길이 없었다. 아픈 마음과 괜스런 죄책감을 그나마 생명이 지속된다는 사실로 슬그머니 달래 버렸다. 그렇게, 3주를 지내며 더 이상의 발열도 없었고 등과 옆구리 화상부위 및 관통창에는 발간 육아조직이 자라고 있었다. 수술부위의 상처들도 자리가 잡혔다.

인공호흡기도 멈췄고, 기도절개를 미루며 버텨오던 기도관도 제거했다. 박상병이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사이 바싹 말라버린 박상병은 정신을 차리면서 오히려 군의관들을 힘들게 했다. 현실을 서서히 깨닫게 되면서 차오르는 불안과 공포와 절망감을 입으로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주렁주렁 매달린 약병 사이에서 부서진 육체로 꼼짝 못하고 누워 흐느끼는 젊은 장정을 바라보는 일은 너무나도 불편했다. 정신과 군의관이 나서서 도움을 주었지만, 그 역시 박상병의 망가진 육체와 앞으로 닥치게 될 고난을 대신해 줄 수 없음은 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박상병은 그렇게 회복돼 갔다.

그사이 오중사는 방광수술을 위해 비뇨기과로 옮겨지고, 부정장 이중위도 정형외과 일반병실로 옮겨졌다. 박상병이 서해교전 환자들 중 가장 늦게 중환자실을 빠져나와 외과병동으로 옮겨지게 됐다. 가장 위중했던 그의 회복으로 서해교전으로 인한 전투 시의 사망자 외 추가 사망자는 단 한명도 나오지 않았고, 이에 고무된 병원 측은 수고한 군의관들에게 포상으로 위로휴가를 주었다. 많은 젊은이들에게 고통스러운 사건에서 파생된 개인적 호사여서 마음이 불편했지만, 내가 어쩔 수 있는 일도 아니라며 자위를 했다. 따지자면, 6.25 동란, 경술국치까지도 거슬러 올라가야 할 일이라고….

그렇게 얻어진 휴가로 나는 아내의 출산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내 딸의 첫 모습을 대한 순간만큼은 광막한 우주 속에 나와 아이, 단 둘만 존재하는 감격이었다. 그 때까지 내 삶이 순전히 그 순간을 위한 것이라 해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다시금 현실로 돌아와서도, 배냇짓을 하는 딸아이에게 풍덩 빠져 한참을 허우적거리는 사이에 또 한달 정도가 흘렀다.

어느 날, 박상병이 다시 중환자실로 내려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의식이 나빠져 CT를 찍어보니 뇌실질 전반에 걸친 세균감염이 의심된다는 것이었다. 예의 배수진용 항생제들은 계속 사용되던 중이었고, 중환자실에서 다시 만난 박상병은 완연히 수척해진 모습으로 인공호흡기와 약병들에 또다시 생명을 매달고 있었다.

새로 개발된 항생제들을 민간에서 구매해서 사용하기도 해봤지만 패혈성 쇼크가 이어지며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결국 9월 20일 금요일 새벽에 젊은 심장은 마지막 박동을 끝냈다. 이틀 뒤, 가족들의 오열 속에 우리병원에서 영결식이 거행되고 박병장(진급했다)은 대전국립묘지에 묻혔다. 충무무공훈장도 수여됐다. 하지만 그는 꿈꿔왔을 나머지 인생을 하늘로 가져가야 했고, 그의 부모님은 아들을 잃었다. 그를 만났던 군의관들의 가슴에도 구멍이 났다.

옴짝달싹 못하는 역사의 틀 속에서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고, 인류사에 전쟁이 없어지는 일은 아마도 없겠지만, 한 선량한 젊은이의 아까운 죽음을 옆에서 지켜봐야 했던 일은 말할 수 없는 무력감을 안겨줬다. 나도, 내 주위의 사람들도 남이 일으키는 전쟁에 인생을 맡겨야 할 수도 있는 초라한 존재일 뿐이었다.

군의관 생활을 하면서 바라본 전쟁은 더욱 두려운 모습으로 저 멀리 서있다. 아득하게 멀지만 언제 달려들지 모르는 그의 섬뜩한 실루엣을 본다. 갖가지 대의명분으로 치장 해도 전쟁은 부서지는 육체와 영혼을 제물로 삼아야 한다. 전장에서 맞닥뜨려야 할 맹목적인 폭력들. 그리고 잇따르는 수많은 이의 비극들. 이를 막기 위한 소위 ‘전쟁억지력’을 키우기 위해 수많은 젊은이들을 군인으로 만들고, 더 많은 무기를 갖춰야 하는 또 다른 아이러니….

그렇게 가을을 보내던 중 병원 앞 산책로에서 이중위와 그의 휠체어를 밀고 있는 약혼녀를 만났다. 처음 중환자실에서 대하던 날의 우울했던 첫인상이 무색하게도 그들은 밝은 모습이었다. 이중위는 의족보행 연습을 시작한 뒤였고, 퇴원후 다시 해군으로 복귀해 사무직에서 복무할 예정이었다. 그들의 결혼도 예정대로 이뤄질 거란다.

삶은 계속되기에 여전히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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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1월에는 강원도 거진 동쪽 해상에서 명태잡이 어선을 보호하던 우리 해군 초계 호위함(PCE-56, 650톤급)이 북한 해안포의 기습공격으로 침몰합니다. 승조원 79명 중 39명이 전사하죠. 얼마 전 서해 교전과는 비교도 안 될 일입니다.

당시 해군 함정이 침몰당하고 거의 승조원 절반(39명, 참고로 서해교전 전사자는 6명입니다.)이 전사한 이 대형 사건에 이후 추모제가 매년 거행되었다거나 추모비가 건립된 바를 알지 못합니다. 추모제나 추모비가 없는데 대통령이나 장차관 그리고 해군 참모총장이 참석할 수가 없었겠죠.
 
다음은 1970년 6월에 서해안 연평도 부근 공해상에서 어선단 보호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우리 해군의 120톤 급 방송선을 북한 해군이 공격을 해서, 승무원 20여 명이 대부분 사살당한 채 납치당한 사건이 있습니다. 연평도 하니까 꽃게잡이가 떠오르시죠? 이 글의 주제인 서해교전도 결국 꽃게잡이가 문제였으니까요. 거의 같은 장소에서 우리 해군 함정이 손 한번 써 보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후에 20여 명의 생떼 같은 젊은 목숨이 어디 하소연 한번 하지 못하고 죽어나갔습니다. 역시 추모비 따위나 사과표명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1974년 6월28일에도 동해안 거진 앞바다에서 북한 해군 함정 3척의 공격을 받고 우리 해경 경비정 863함이 격침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죠. 이번엔 오징어잡이 어선 보호하다가.
 
참 이 사건을 보면 맘이 아픈 게…
 
기본적으로 당시 해경은 지금과 달리 장비나 훈련상태 그리고 기지의 시설 등 모든 면에서 열악한 상황이었고, 또 나중에 떠내려온 전사자들의 상태를 확인해 본 결과 최후까지 필사의 접전을 벌이다 장렬히 전사한 걸로 판단이 되기 때문이랍니다. 가령 인양된 시체 6구 모두 구명복 착용에 관통된 다리의 지혈을 위해 옷을 찢어 동여맨 채 발견되는 등 .. 밀리매니아로서 현장의 격렬한 전투가 그려져서 맘이 이만저만 아픈 것이 아니었죠.
 
게다가 사건 2주일 후에 전투 현장에서 163마일이나 떨어진 영일만에 김시오, 김원한 두 순경의 시신이 떠내려 온 겁니다. 이 두 순경 분의 고향이 경북 울주군과 경북 영일군으로, 자신의 고향에 부모, 형제, 처자를 찾아 먼길을 떠내려 왔다고 해서, 유가족과 많은 사람의 맘을 참이나 아프게 했던 걸로 유명하죠.
 
다시 이 글을 쓰면서 그 당시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려니 처자식이 있는 가장으로서 맘이 정말 무겁군요.

나중에 해경에서는 1986년 12월 30일에 이 사건을 포함한 해경 창설이래 순직, 전사한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합니다.

충혼탑 건립이 언제라고요? 1986년… 고 박정희 대통령 사후 만 7년 후에…

그나마 이 충혼탑은 이후 역대 정부로부터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가 2002년 4월과 6월에 성역화 작업이 실시되고, 2003년 4월에 조경공사가 추가로 실시되었답니다.

 
 
2002년과 2003년이 언제죠? 누가 당시 대통령이었죠?
 
3.1. 서해교전 이후 노무현의 행적입니다.
 
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벌어진 남북 간의 해군 교전 이후 그 양반이 어떻게 처신을 했는지 소개를 해 드렸으니, 이번에는 서해교전 이후의 노통의 행보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해 드립니다.
서해교전은 2002년 6월 29일 연평도 근방에서 북한 해군의 기습공격으로 우리 해군 함정이 침몰당하고 윤영하 소령을 포함한 6명의 해군이 전사한 사건을 말합니다.

(1) 노 대통령, 서해교전 희생자 추모

[YTN   2003-06-27 19:51:01] 

노무현 대통령은 서해교전 1주년을 앞두고 오늘 오후 해군 2함대 사령부를 방문해 당시 침몰했다 인양된 고속정 참수리 357호 전시장을 둘러본 뒤 서해교전 전적비에 헌화, 묵념하고 애도의 뜻을 표했습니다.
 
 
(2) 노대통령, 보훈처 부 승격 약속
[YTN 입력시각 : 2003-06-25 16:47 ]

노무현 대통령은 오늘 청와대에서 지난해 서해교전 전사자 부모 등  국가유공자 유족 2백28명을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함께하면서 이같이 밝혔습니다.
 
 
(3) 서해교전 부상자에게 전화 위로

노 대통령은 이에 앞서 지난 19일 서해교전 당시 다리를 잃고 최근 현역에 복귀한 이희완 중위에게 전화를 걸어 격려한 바 있다. 노 대통령은 전화 통화에서 이 중위의 건강상태를 물은 뒤 “이 중위의 용기가 많은 국민에게 큰 힘을 줄 것”이라며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겠지만 전사자들 몫까지 열심히 근무하길 바란다.”라고 당부했다.
 
이렇게 서해교전일 즈음에만 전사자 가족들을 챙기는 게 아니고 설날에도 꼬박꼬박 선물도 하고 관심도 표명합니다. 2005년 설날 직전의 mbc의 기사를 보시죠.
 

(4) 유가족에게 설 선물

[mbc 2005-01-31]

● 앵커: 청와대는 노무현 대통령 내외 이름으로 지도층 인사와 소년소녀 가장, 경찰과 소방관 가족, 서해교전 희생자 가족 3,989명에게 설 선물로 전주 이강주와 지리산 곶감 등 농촌 특산물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사회]  김주하 앵커
 
 
(5) 유가족들과 청와대에서 오찬
 

또 별도로 유가족들과 청와대에서 오찬도 함께하고요.

[KBS 2007-05-02]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2일 낮 군 작전 및 해외파병 임무수행 중 순직한 장병의 유가족을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함께했다.

이날 오찬에는 고(故) 윤영하 소령 등 서해교전 전사자 유족 10명과 고 민병조 중령 등 동티모르 파병 순직자 유족 10명, 지난 3월 아프가니스탄에서 순직한 다산부대 고 윤장호 하사 부모 등 모두 22명의 유족이 참석했다.
 
저는 기본적으로 우리 사회가 아직도 조국을 위해 순직하거나 산화한 이들에 대한 감사와 존경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이 앞장서서 더욱더 많은 관심을 표명해 주신다면 저는 더 좋겠다는 바램이 있습니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 정도의 발자취라면 적어도 누구에게 서해교전에 관심이 없다거나 유가족들을 방치해 놓았다거나, 왜 추모제에 참석하지 않았느냐 라는 식으로 욕을 먹을 상황은 아니라고 봐야죠.
 
게다가 비슷한 시기에 화재사건으로 사망한 거리의 여성들 가족이 1억 원의 보상금을 수령하였지만 처음 서해교전 전사자 가족들이 국가로부터 3천만 원 남짓한 보상금을 받은 걸 보고, ‘전사자들의 목숨이 창女의 목숨보다 헐값이냐?’라는 식의 막말을 듣는 걸 보면 정말 가슴이 답답하고 이 나라의 언론 중에서 제대로 된 언론이 단 하나라도 있기는 한 건지 막막하네요.
 
당시 이렇게 보상금이 적었던 이유도 사실 따지고 보면, 고 박정희 대통령 당시에 제정된 군인 연금법 시행령의 사망보상금 규정에 따른 것인데 말이죠.
 
결국, 이 규정은 노무현 정권 출범 2년째인 2004년 1월 군인연금법시행령이 개정되어서 적과의 교전 과정에서 전사한 군 장병의 유족들이 최고 2억 원의 사망 보상금을 받을 수 있도록 바뀌었죠.
 
생각할수록 정말 어이가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전사한 장병이나 장교들의 유가족들이 그나마 제대로 된 보훈 조처를 받게 된 것도 그렇게 빨갱이 친북 좌파 정권 소리를 듣는 노 대통령 임기 중의 법 개정 덕분이니. 참고로 대략 3천만 원 선의 국가 보상금을 받은 서해교전 유가족들은 이후 국민적인 성금의 모집을 통해서 24억 원가량을 추가로 전달받게 됩니다.

3.2. DJ와 노통의 전사자 유해 발굴 사업

마지막으로 예전에 썼던 전사자 유해 발굴 사업을 한번 더 언급하고 마치겠습니다.

6.25 이후 50년째인 2000년 6월에 ‘6.25 전쟁 50주년 기념 사업단’이 결성되고 산하 사업으로 ‘전사자 유해 발굴 사업단’이 조직됩니다. 2003년까지 3년간 한시적으로 운영 계획이 짜이죠. 보수진영으로부터 원조 빨갱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DJ 정권에서 말이죠. 이 3년 동안 전사자 유해 781구와 유품 2만 6천여 점이 수습됩니다.

그런데 2003년 6월 보수진영에서 2번째 빨갱이 정권으로 찍힌 노무현 정부가 이 사업을 영구 사업으로 전환합니다. 육군 본부 유해발굴 담당부서가 정규 편제로 전환되죠. 물론 사업 예산도 넉넉지 못하고 인력도 많이 부족하지만, 노통이 집권한 이후 1천여 구 이상의 전사자 유해가 추가로 발굴이 되고 신원이 확인되었습니다

도대체 누가 누굴 아마추어라고 했던거지... --;;;

근대 이후의 정치사에서 보수냐 진보냐가 나눠지는 일반적인 지형과는 달리, 우리의 경우엔 다른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가 주요한 경계점이 됩니다. 바로 북한이죠.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따라 별루 좌파적이지도 않아도 '좌빨'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는데요... 더 큰 문제는 이게 현실 정치공학적 문제로 작동하는게 아니라 거의 종교적 신념 비시무리한 넘으로 작동한다는 걸껍니다.

이전의 블로그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제 입장은 북한이 쌩양아치 집단이라는 것에 대해선 이견이 없지만, 얘네들의 즉각적인 붕괴는 우리의 붕괴로 이어진다는 것 때문에... 걍 그 상태 그대로 유지해주기만 하면 된다는 입장입니다. 북한의 남침시도가 잡히면 바로 선재공격을 하는 것으로 작계가 잡혀 있고... 실제 전쟁이 발발한다고 하더라도 누가 이기느냐는 문제는 명백한 물리력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질문할 가치도 없죠.

문젠... 없는 집에서 집이 날아가는 것과 달리, 있는 집은 현관이 깨지는 것만으로도 데미지가 장난이 아니라는 겁니다. 수출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90%가 넘는 넘의 나라가 War Zone이 될 경우엔 일반 회사들이 감당할 수 없는 전쟁보험을 들어야 수출을 할 수 있죠. 이땐 물건을 팔면 팔수록 손해를 보게 되졉...

햇볕정책(북한은 이 말을 아주 싫어했었습니다만)은 상당한 부분에서 맹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서해교전과 같이 바보같은 작전을 펼칠 수 밖에 없었으니까요), 큰 줄기에선 상호이익이었던 정책이었죠. 북한의 입장에선 체제유지가 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입장에서도 굶어죽거나 마지막 발악으로 밀고내려오는 것을 막을 수 있었으니까요...

이에 대한 비판을 하는거야 야당으로서 당연히 가질 수 있었던 권리였지만... 국가 운영을 책임지는 여당의 입장에서 10년간 유지되어왔던 정책을, 그것도 뽀쪽한 대안이나 독트린도 없는 상태에서 폐기한다는 건 어지간히 골빈 짓거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짓거리죠... 더 웃기는 건 북한을 지속적으로 자극하면서도 국방비 지출을 한참을 줄이겠다고 하고 있는겁니다. 애들 씻기는 것도 난방비 아낀다고 줄이겠다고 하는 것이 FT를 통해 보도되어 거의 거지군대 취급을 받고 있는 것도 깨는 판인데... 별 실효성이 없는 MD에는 참가를 하겠다고 한다는 거... 동그란 네모를 그리겠다는 이야기죠 뭐.

뭐 ROTC장교 출신이라고 군사전문가를 자청하는 그 당의 국회의원은 우리쪽 대포병 부대가 발닦고 낮잠만 잔다고 생각하는지... 한번 쏘면 재장전하는데 시간 졸라 걸리는 장사정포의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는 포탄이 쏟아질 것이라고 떠들어댔었는데... 국방비를 줄인다니... 뭐 하자는 플레이인지도 모르겠는거죠.

거기다 경제전문가라는 대통령께선 세계 경제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기 위해 CNN을 보신다는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웃다가 커피 쏟을 뻔 했습니다. Economist와 블룸버그를 보고 있다고 하면 모르겠는데... 속보에 목숨걸어 정확성은 물론이고 분석도 좀 아니올시다인 그 넘을 본다는 거이... 뭐 하시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데요.

하긴... 아직도 야당인 거 같다고 하시면서 컴터를 열흘 넘게 못썼다고 궁시렁거렸는데... 알고보니 기술직인 8급들을 몽땅 다 잘라버리고 그 자리까지도 행정관을 집어넣었으니... 뭐가 제대로 되었겠어요. 노무현 정부의 아마추어리즘도 질려버렸던 판국에... 그 보다 더한 인간들이 아스트랄한 행각들을 벌이고 있는데두...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지켜봐야 한다'로 집중되더군요. 근데... 지금 청와대 세입자 분 말이죠... 세계적 경제지로 손꼽히는 FT에서 후보시절부터 두들겨 맞았던건 아시나들 모르겠습니다...

읽을 만한 것들이 점점 줄어갑니다.

박권일씨의 쟁가 블로그가 작년에 문을 닫더니 오늘은 우석훈 선생도 자신의 블로그를 닫아버리더군요. 네모난 동그라미를 말씀하시는 대통령이 청와대에 계시는 기간동안 정신줄 놓지 않으려면 양서만 읽고 좋은 내용들만 기억해야 하니...

블로그 돌아다니면서 남들의 생각의 편린들을 보는 것보다... 그냥 닥치고 독서나 해야 하는게 아닌가란 생각도 좀 듭니다요. --;;

2008년 3월 27일 목요일

1774Km

지난 주말, 제10회 흥부기행의 답사를 떠났었습니다. 쫌 늦었던 까닭에 쫌 쎄게 밟았죠. 경부고속도로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창녕에 도착해 우포늪에서 창녕환경연합분들과 잠깐 이야기하고, 대충 얼마걸리겠는지, 뭘 봐야 하는지, 그런거 따지곤 대구로 날라서 저녁을 선배네 부부가 운영하는 인도방랑기에서 먹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인산동천에 가서 1박을 하고, 아침 먹고 바로 순천만으로 가겠다고 나왔는데... 아뛰... 차가 퍼지는 겁니다.

본넷을 열어보니 거의 무대에서 스모그 뿌리는 것마냥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가더군요. 시동은 안걸리고... 결국 에니카 불러서 견인해 갔더니만... 쩝~ 라디에이터로 연결되는 관 하나가 삭았다더군요. 거금을 주고 문제의 부품을 갈고 순천만과 광양 매화마을을 거쳤는데... 쉬파... 하동에서 차가 서 버리더군요. ㅠㅠ

19만키로 쯤 달린 찬데... 쥔 혼자 탄게 아니라 이 넘 저 넘이 트럭 대용으로 하도 많이 이용해놓으니 차 상태가 심히 불량했던 차에... 900키로를 냅다 고속도로로 달려놓으니 차가 견디질 못했던거 같더군요. 차는 하동의 한 피자 가게에 양해를 구하고 버려두고 일욜 저녁에 일단 올라왔습니다.

그리곤 월욜... 날 존나 춥더군요. 주말에 돌아다닐때 비 맞았던 거랑 찬 바람이 결합되니 얼음마녀의 기습이 이어지데요. 정신 못차리는 상태에서 얼렁뚱땅 8페이지짜리 사업계획서를 영문으로 바꿔서 보내주고... 방으로 들어갔는데...

아... 완전 죽음이데요. 억지로 감기약 먹고 뭐 그래가지고 점심때쯤 나와서 볼일 좀 보고... 저녁은 인사동에서 네팔 짱 마담과 먹고... 들어가던 차에 전화가 왔습니다. 하동에 퍼져 있는 차를 폐차하기로 했으니까 그 차 안에 있던 짐을 가지고 올라와야 한다고...,

몸 상태가 거의 퍼져버렸던 차랑 상태가 비슷했는데두... 우짤 수 없이 달렸죠 뭐. 대충 800키로를 오락가락하는 거리를 밤 10시에 출발해 아침 7시반에 서울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졸리면 안되니 원두커피만 4잔을 퍼넣고... 목캔디만 빨면서 다녀왔더니... 배고프고 졸리고 춥고... 정신 못차리겠더라구요. 방에 들어가서도 말똥말똥 커피의 영향이 남아 있어 소주와 맥주를 비벼서 너겟을 안주로 한 병씩 까고 바로 기절했었습니다.

짭... 문젠 거기서 또 출발되더군요. 어제 하루 죙일 설사하는 겁니다. 그래도 밥은 넣어야겠다고 억지로 넣었더니 저녁때쯤 진정이 되었는데... 오늘 아침에도 화장실을 4번 왔다갔다하게 만들더군요.

아직도 몸이 제 상태는 아닙니다만... 그래도 살아는 난 셈이라... 이것저것 하는데... 말이 계속 꼬이고 있습니다. 뇌 신경의 상당부분이 아직도 자고 있나봐요. ㅠㅠ

2008년 3월 25일 화요일

어휴~ 그럼 우리가 일본이죠...

지난 주말, 우포늪과 순천만, 그리고 광양 매화마을을 다녀왔습니다. 다음달 이맘때쯤에 진행될 예정인 단체 기행의 답사 때문에 갔던 건데요... 매화마을에서 나오자마자 차가 퍼지는 바람에 바보되어버렸던 것 이외에도 숱한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만... 그 우여곡절보다도 두 늪지대의 상태에 실망한게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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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포늪, 첨 당황하게 만들었던 건 주차장에서 우포늪으로 가는 길을 시멘트 공구리 치고 있더라는거죠. 우포늪 만큼 되는 습지를 가지고, 그걸 보존하겠다고 람사르 협약에까지 참여한 나라들 중에서 길을 콘크리트로 까는 엽기적인 나라가 몇이나 될거 같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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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으로 당황스러웠던 건... 2000원 주고 들어간 생태학습관이었습니다. 생태학습관은 돈 들인 티가 팍팍~ 납니다. 그런데 그게... 하나같이 문제들이 몇 가지라구요. 우포늪의 자연환경을 아이들에게 알리겠다고 아이들을 대상으로 안의 내용들을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들이 아이들의 "키"와 안맞더라구요. LCD 콘솔에선 플래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우포늪 생태계에 대한 설명이 돌아갑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고학년이 아니라면 LCD가 제공할 수 있는 화각 밖에서 이 내용을 볼 수 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는 3D로 틀어주던 만화영화였는데요... 두꺼비의 엽기호러액션러브 스펙타끄르... 유럽이었으면 얼라들에게 이런거 틀어주면 잡혀갑니다요. 뭐 이외에도 색감 자체를 방해하는 조명도 갑갑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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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만은 상대적으로 좀 나았습니다. 모든 시청각 기자재들의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으며 갯벌과 갈대밭의 사이를 달리는 데크도 꽤 좋은 아이디어였다고 보는데... 문젠 작동되는게 절반이 안되더라는 것, 그리고 관리직원들이 나와 있지 않은 관계로 생태와는 상관없는 놀이터가 되어버린게 아니냐는 생각이 좀 들더라구요. 갯벌에 사는 생물들을 가까이 가서 보겠다고 만들어놨는데... 모두 떠들고 지나가고(이러면 철새들 보기 난감해지죠), 뛰어다니고(아뉘... 못 피하면 갯벌로 빠지라는??), 노점에서 산 각종 군것질 쓰레기들을 갯벌로 던져버리는 분들을 보면서 뭐하고 있는건가 싶더라구요. 뭐 조류탐사선이라고 이름이 붙은 배는 해수욕장에나 있어야 할 시끄럽고 빠른 소형 모터보트라는 사실에도 할 말을 잃긴 했습니다만...

어제 만난 지인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이 양반이 이렇게 대답하더라구요. "그런 문제들이 없으면 이 나라가 대한민국이 아니고 일본이죠~"

하루 유지비 5천만원짜리 초대형 어항 하나 생겼다고 만세 부르고, 소규모 지방 도시의 동물원 정도 되는 넘을 한강변에 만들었다고 사람들이 복작거리는 나라는 뭘 어떻게 해야 그게 제대로 되는건지 별 관심들이 없죠. 언론 로비만 제대루 하면 TIME지의 환경영웅까지 될 수 있으니까 말이졉. 걔들이 뭐 확인하러 오는 것두 아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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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세대가 만들어낸 이것을 지역문화축제로 날루 먹으려다 탈 나니까... 광양군청은 자기네 홈피에서 매화마을축제의 링크를 날려버리더군요. 2MB정부의 특징이 그건가봅니다. 타조되기. ㅋㅋ

2008년 3월 24일 월요일

크리미널 마인드 2x17, 외상형 장애에 대한 단상

이 역시 같은 동호회에 작년에 썼던 글입니다. 크마 이야기가 나온 김에 안 올릴 수가 없더군요. ^^;;


작년 여름에 귀국하기 전까지 거의 1년을 인도와 네팔에서 지냈습니다. 우연찮게 선배의 다큐 작업에 행정으로 참여했던 게 이런 저런 인연으로 확장되어 좀 오래있었죠.

네팔이야 작년 4월 왕이 사실상의 항복선언을 하는 덕에 거의 10년을 끌었던 내전이 정리되어 가던 중이라 신변의 위협을 느낀 적이 없었지만 인도에선 단 1주일의 차이로 다큐 촬영팀 전체가 북망산 등정을 할뻔 했었습니다.

작년 7월 11일 인도 뭄바이의 suburban기차길을 따라 연쇄적으로 폭탄이 터졌던 그 길을 딱 1주일 전에 정확하게 따라가면서 촬영을 했었거든요. 여러편을 동시에 촬영하느라 폭탄이 터졌던 그 날엔 꼴까따에 있었습니다. 식은 땀 한번 흘리고 나선 그 다음부터 일이 벌어지면 얘네들은 어떻게 대응하는가를 관찰할 수 있었었죠. 인도의 영자 신문과 주간지들을 참 열심히 사서 봤는데요... 그 더운 동네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더군요.

지금까지도 폭탄테러를 감행한 단체에 대한 윤곽은 불분명합니다만, 용의선상에 바로 올라가버렸던 이들은 LeT를 비롯한 인도 내부의 이슬람 과격단체들이었습니다. 핵실험 한 번씩 교환하고 전쟁 분위기 물씬 풍기다가 정권이 바뀌면서 당시 연립정부를 이끌던 국민회의가 목숨 걸고 진행하던 것이 파키스탄과의 긴장완화였는데... 그 분위기 바로 싸해졌었죠. 당시 싱 총리도 외부에서의 적(거의 파키스탄을 겨냥한) 어쩌구 하는 이야기를 국회에서 꺼내기도 했었으니까요.

그런데 재미있던 건 파키스탄 쪽의 반응이었습니다. 일이 터지자 마자 가장 먼저 위로 전문을 보냈던 나라들 중에 하나였음에도 대놓고 배후세력 취급을 받으니 정치권이야 외교적 발언들만 하고 있었지만 파키스탄 일반인들의 반응은 바로 냉각되었거든요. "그 일이야 유감이긴 하지만, 너넨 쥐가 죽어도 우리 탓이라고 하지 않냐?" 뭐 이러면서 말이졉.

그런 내용들이 들어간 시사주간지에 실렸던 파키스탄 방문기를 읽다보니 묘하게 우리의 모습이 close up되더군요. 아시다시피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인도는 두 나라, 하지만 세 조각으로 나뉩니다. 왼쪽에 파키스탄, 가운데에 인도, 오른쪽에 동파키스탄으로. 그리고 또 다시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독립하면선 아예 세 나라로 갈라지죠. 힌두와 무슬림의 오랜 반목이 결정적인 원인이긴 했지만 이렇게 갈라지는 과정에서 양쪽에서 수없이 많은 목숨들이 희생됩니다. 인도 루피화에 항상 모습을 드러내는 간디 영감님의 암살도 이 당시의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구요.

내전에 가까운 상황으로 분리되었던 나라여서 그런지 서로의 적대감은 장난이 아닙니다. 인도에서 가장 큰 욕이 "짤루 파키스탄"(파키스탄으로 꺼져~!)일 정도니까요. 둘 다 핵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 수준이라는 게 작년에 실험한 북한 핵보다 못한 넘이고, 실제 전투의 경험이라고 해도 카쉬미르와 스리나가르에서 심심찮게 터지는 폭탄을 제외하곤 대포 몇 발 쏘는 수준이긴 합니다만... 전쟁 참가자들의 상당수가 겪는 외상형 스트레스 증후군의 경험에서 좀 비슷한 것들이 발견되더라구요.

1, 2차 세계대전은 물론 베트남전에 참여했던 상당수의 참전군인들이 전쟁에서의 경험 때문에 지독한 사회부적응 상태를 겪게 되죠. 하지만 비슷한 수준의 전쟁경험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경우엔 이런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이는 군 경험 이전은 물론 군 이후의 일상적인 사회생활에서도 특정한 이들을 '적'으로, 정확하겐 같은 인간이라기 보다는 말살해야 할 대상으로 인지시키는 심리적 과정이 있기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는 것으로 겪는 고통이 상대적으로 적은 거죠.

이는 광주에 투입되었던 사병들이 대표적인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전두환과 노태우가 특별법으로 구속되고 나서 80년 광주 진압에 나섰던 특전사 사병들이 10년이 넘은 세월에도 불구하고 정신병원으로 후송되었던 사례들이 꽤 많거든요. 시민군으로 참여했던 이들보다 늦게 발병한 경우가 많았던 것은 자신들이 정당했다고 생각했던 얇은 믿음이 허구였다는 것을 많은 시간이 지난 뒤에야 깨달았기 때문인거죠.

하지만 사회 일반이 가진 적대감이라고 하는 것도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걸 감안한다면 외상형 장애가 은폐되었을 뿐, 언제 다시 드러날지 모르는 상황으로 봐야 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가끔 한국 사회 전체가 정신 오락가락하는 것 같아 보이는 사태들이 보이는 이유들 중에 하나가 이게 아닌가란... 그런 생각도 좀 하게 되네요.

크리미널 마인드 1x14, 사형제도에 대한 잡담

작년에 어느 미드 동호회에 올렸던 글인데... 사형제도를 다시 살린다는 이야기에 여기다가도 올려놓습니다.
 
 
뒤늦게 C.M.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뭐 다른 이유는 없고, <Gilmore Girls>의 에밀리 길모어 여사의 한 말씀이 계속 생각나서요.
 
"요즘 TV틀면 법의학물 밖엔 없어!" 이 말씀이 말입니다. ^^;;
 
SF물도 볼게 많았던데다가(Stargete SG1은 시즌 10까지 갔었잖아요), 최근엔 <West Wing>을 복습하면서 정책과 관련된 영어들 줏는 재미에 좀 빠져 있었거든요. 뭐 <Bones>에서도 계속 나오는 말이긴 합니다만, 심리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약간의 불신도 좀 있었던 편이어서 프로파일링이라는 것 자체에 대한 신뢰가 CSI가 제공하는 과학적 확실함과 거리가 있었던 것도 한 부분을 차지하구요.
 
암튼, 보기 시작했는데... 많은 분들이 감상문을 올려놓은 것처럼 시즌1은 에피소드 14가 가장 감동적이었습니다. 뭐 그 감동의 정체가 모정이라는 것의 무게라고만 정리하면 스포일러 뿌렸다는 소린 안 들어도 되는 걸로 알겠습니다. ^^;;
 
사실 14편을 보고 나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그 모정의 위대함보다는 사형제도입니다.
 
사형, 이거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낙태와 함께 어느 정당을 지지하는가라는 것을 구분하는 꽤 중요한 갈림길입니다. 미국의 경우에 사형 찬성, 낙태 반대에 기독교도라면 거의 공화당의 오른쪽 끝에 가 있는 사람들이고 사형 반대, 낙태 찬성이라고 한다면 거의 대부분 민주당원들이죠. 당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당론의 반대쪽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중도로 분류되기도 하구요.
 
이 포인트에서 제 입장을 밝히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사실 전 기본적으로 사형 반대, 낙태 반대입니다. 하지만 낙태에선 의학적, 윤리적 요소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사회적 규범으로의 낙태 반대가 아니라 여성 본인의 의사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임신해선 안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뭐 그렇다고 제가 사형을 반대하는 이유는 엄중한 처벌을 반대하거나 모두가 교화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은 아닙니다.
 
첫 번째 이유는 사람이 워낙 불완전한 존재기 때문에 언제든지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건 단순히 가능성의 문제만은 아닌게... 국민의 정부에서 참여 정부로 넘어오는 동안 사형을 선고받은 이들을 조사했던 기사를 읽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사형수중에서 대졸 이상의 고등교육을 받은 이가 아무도 없다고 하더군요. 경제적인 격차는 말할 수도 없구요. 대졸자가 살인을 안 하는 것도 아닌데... 이런 판결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그걸 어디까지 신뢰해야 하는가란 생각이 들더라구요.
 
두 번째 이유는 정치적인 이유에 의해 이게 악용될 가능성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유신시절 인혁당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죠. 정치적 반대자를 사형시키는 건 아프리카 오지에서 군벌들끼리의 전쟁에 소년병들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 수준의 야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우리에겐 아직도 낯설지만 원래 정치라는 것의 용도엔 사회의 통합과 비전 제시라는 것이 포함되는 것이니까요. 그 용도와 한참 벗어난 형태로 악용될 수 있다면 막아아죠.
 
마지막으론 정말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놈에게 생을 앗아가는 것은 그 자체가 자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영화 <밀양>에서 처럼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신으로부터 용서받겠다고 나서는 놈들에게 사형은 마지막 안식을 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West Wing> 시즌3의 0번째 에피소드인 <이삭과 이스마할>에서 자쉬 라이먼이 이런 말을 하죠. 테러를 벌이다 잡힌 놈들에겐 그들의 행위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을 찍은 사진과 동영상을 매일 보여줘야 한다고...
 
고통은 몸보다는 정신이 느끼는 부분이 더 크기 때문에 전 자쉬의 말에 동감을 했었죠.
 
하지만 문제는 중범을 저지른 죄수들을 사형시키지 않고 죽을때까지 감옥밥 먹인다고 한다면 그 사회적 비용이 로켓처럼 올라가버린다는 겁니다. 특히 사형수들의 경우엔 그 죄질이 극악한 경우가 많이 때문에 극악한 놈들을 같이 가둬두기 위해선 복잡하고도 비용이 많이 드는 시스템을 유지해야 한다는 거죠. 중죄를 저지른 놈들끼리 싸우지 않도록 보호해야 하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을 겁니다.
 
범죄 자체의 발생빈도로 놓고보더라도 중범죄 발생빈도는 현저하게 낮은데 얘네들 때문에 아까운 국민 세금을 그냥 태워야 한다는 건 아무래도 논란거리죠...
 
ps1. 어느 선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주의를 끌고 싶으면 바하의 무반주 첼로 조곡 No.1 G 장조 BWV 1007. 이걸 야노스 스타커의 연주로 틀어놓고 글라스 가득 소주 부어놓고 있으라고. 뭐 우리에겐 L전자 D냉장고 광고로 더 유명한 곡입니다만...
 
ps2. 사실 사형과 관련된 이런 복잡한 이야기들은 추상적 의견로 분류되어야 할 내용들이죠. 교도관들의 자기 방어 시스템을 개발하지 않은 상태에서 교도소 수감자들에게 기초적 인권을 보장하니 교도관들이 죽어나가는 지금의 대한민국의 상황은 아무래도 이런 추상적 이야기보단 디테일한 대안이 필요하니까요

ps3. 유영철과 이번에 두 어린 소녀를 죽인 살인범은 전형적인 싸이코페쓰죠. 반사회적 행동장애를 가지고 있는 이 사람들은 대체로 10만명당 1명 정도로 태어난다는 사회적 돌연변이들입니다. 이들의 정신상태를 분석하는 것은 가능하니 이들을 처음부터 격리시키는 방안들에 대해 가끔 이야기들도 나옵니다만... 이들이 또 다른 인물들과 겹친다는 것 때문에 시도되지 않고 있죠. 인류사에서 길이 남을 업적을 가졌던 정치인들과 성공한 비즈니스맨에도 이런 반사회적 인물들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겁니다. 정치인의 대표주자로 꼽히는 건 히틀러가 아니라 윈스턴 처칠이며, IT바닥에서 날고 긴다는 세계적 기업의 총수들의 심리상태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거든요. 인간이라는게 얼마만큼 복잡한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해야겠죠.

2008년 3월 21일 금요일

디셉션 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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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eption 기만, 속임수... 뭐 이런 뜻이죠. 요즘 하도 골 아픈 일들이 많아서 머리 좀 식히겠다고 들었던 책인데... 뭐 줄줄 잘 넘어갑니다. 넘어가는데 내용은 허당이더군요. 책 서문에서 소설 속에 묘사되는 장비나 기관은 실제로 있는 것이라고 썰을 풀고 넘어가는데... 쩝~ 솔직히 그거부터 별루 맘에 안들었습니다.

Discovery Channel에 Mithbusters라는 꼭지가 있죠. 장난꾸러기 같이 생긴 다섯이 과학적 근거가 있는 것이냐... 뭐 이런 걸 가지고 죽어라고 따져들어가는 프로그램인데... 여기서 이 소설에 나오는 탄환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일단... 그거 기억이 나서 김이 빠졌고, 이미 중반쯤부터 누가 조작을 했는가라는 문제로 들어갔을때 대충 감 잡히는 부분들이 좀 있었거든요. 그리고 여주인공의 아부지가 삽질을 어떻게 할 것이라는 것도 중반쯤 넘어가면 요해 가능한 부분으로 들어갔구요.

딱... 한 나절 정도의 시간에 할일 없고, 뭔가 션 한 느낌을 좀 받아보고 싶으신 분들에겐 추천하겠습니다만... 좀 장중한 분위기를 원한다거나... 톰 클랜시 정도의 규모(사실 이 아저씨도 <드레곤 & 베어>에선 자기가 극우 인종주의자라는 걸 아주 적나라하게 자백을 합니다만...)의 뭔가를 원하시거나.... 그런다고 한다면 비추되겠습니다.

글쎄... 댄 브라운의 전작인 <다빈치 코드>처럼 영화화 하기엔 좋은 구조긴 합니다만... 뭐 이 영화를 기다릴 바엔 차라리 <인디아나 존스 4>를 보는게 어떨까 싶은 생각까지 들어버리니... 쩝~

2008년 3월 20일 목요일

티벳, 최소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

티벳 사람들을 실제로 볼 수 있었던 건 델리의 티벳 난민촌(델리 메트로의 북쪽 끝에서 내려 쬐끔 걸어가면 됩니다), 다르질링의 티벳 망명촌... 정도입니다. 카트만두에서 제 등짝에 신발자국을 작년에 안겨주신 분께선 다람살라에서 달라이 라마와 악수까지했다고 합니다만....

하지만 티벳에서의 독립운동을 방송으로 보고 있으면 속이 좀 많이 불편해집니다. 일단 할 수 있는 것들이 거의 없고, 이번의 시위는 89년 천안문과 달리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을 사진 한 장 없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갈 것 같으니까요. 서방의 몇몇 스포츠 스타들은 개인적으로 북경올림픽 불참을 고려하고 있다지만... 대부분의 나라들은 올림픽 보이콧에 대해선 부정적인 입장이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인접해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적으로 많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우리의 입장은 좀 달라야 하는게 아닌가합니다. 뭐 올림픽에 참여를 하든, 말든... 그런 문제가 아니라... 얘네들이 티벳에서 뭔 짓을 했었는가를 기억하는 것, 그리고 티벳을 두고 중국, 인도, 대만이 벌이는 쌈박질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이후 북한에서 뭔 일이 벌어질 것인지 예측하는 것 자체를 포기하는 것밖엔 안됩니다.

솔직히 북쪽의 아저씨들이 쌩양아라는 것에 대해선 이견이 없습니다만, 그 쌩양아가 더 북쪽의 두 나라 놈들에 비해선 대화의 여지가 더 많다고 보는 입장이니 말이졉.

티벳과 중국 한족의 마찰은 그 기원이 꽤 오래된 겁니다. 7~9세기엔 통일왕국을 이루고 독립된 세력으로 존재했었지만.. 그 이후엔 당나라의 영향권으로 들어갔고, 13~14세기엔 아예 원나라의 지배를 받았으며 1750년 청나라 건륭제땐 보호령이 되었었죠. 1912년 청나라가 문을 닫은 이후에도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인 중화민국 아저씨들이 1948년 강제로 쫓겨나기 전까지 기어들어와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대장정(이라고 쓰고, 대도망이라고 읽습니다. ^^;;)때 그 근처에서 좀 얼쩡거리며 붉그죽죽한 친구들을 좀 만들어놨다고... 이전의 중국 왕조들이 했던 행각들을 그대로 따라하죠. 1950년, 한반도에서 전쟁을 하는 동안에도 중국군 정규군을 투입해 티벳을 무력으로 점령해버립니다... 뭐 무력점령까진 그렇다치자구요. 문젠 거의 20년을 중국 대륙이 미쳐 돌아가던 문화대혁명(이라고 쓰고 문화대동란이라고 읽습니다. ^^;;) 시기에... 이 씹숑들이 벌였던 엽기행각들은 일제가 우리에게 했던 것이 차라리 신사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 지랄들이었습니다.

뭔 짓을 했냐구요? 3700여개가 넘던 티벳 곰빠(사원)들이 13개만 남고 몽땅 다 돌부스러기가 됩니다. 수 세기를 버텨왔던 곰빠를 뽀겐 것만 하더라도 탈레반 저리가라할 수준의 엽기행각인데... 얘네들 그걸로 끝나지 않습니다. 비구들과 비구니들을 잡아다가 공개된 자리에서 성행위를 강요하죠. 그걸 거부하면 죽였고, 해도 했다는 이유로 창피를 줬죠. 이거 진두지휘한 분이 나중에 남겼던 명언이 '흑묘백묘'죠. 티벳에서 벌어졌던 참상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이 포스트를 참조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비슷한 엽기행각들은 대륙의 서쪽에서만 진행되었던 것이 아닙니다. 코민테른의 결정으로 1국 1당 원칙이 만들어지자 소련에서 활동하던 조선 사회주의자들은 소련 공산당으로, 중국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자들은 중국 공산당에 입당을 하죠. 그리고 소수민족 정책을 만들어내야 할 정도로 이들의 활동은 만만찮았었습니다. 그런데... 소련에선 일명 '러시아 화', 중국에선 '한족화'라는 결정들이 내려지면서 비명에 간 사회주의자들이 한 둘이 아니죠.

뭐... 연변자치주의 초대 주장이었던 주덕해의 경우엔 쩌우언라이가 그렇게 아꼈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강제 노동에 시달리다가 병에 걸려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하고 쓸쓸하게 죽었으니까요.

암튼... 이 지역을 두고 인도와 중국, 그리고 대만이 벌이는 신경전들도 장난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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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은 제가 2006년 여름에 더위를 피해 다르질링으로 도망갔었을때 찍었던 겁니다. 구멍난 공을 차고 있는 꼬마 뒤로 보이는 버스의 앞 부분만 나와 있는데... 저 버스, 대만이 보낸 의료지원차량입니다. 대만애들이 돈이 넘쳐서 그런거냐...면 그게 아니구요. 티벳은 지네들 땅이니까 지네들 국민으로 대우를 해줘야 한다는 원칙 때문에 그런 겁니다.

자기네 지역이라고 우기는 정도들이 좀 당황스러운게... 중국이 지네들 나와바리라고 주장하는 영역엔 엄연한 독립국가인 부탄도 들어가버립니다.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지를 정한 것도 따지고보면 인도와 중국이 서로 총질을 한 번했던(이라지만 인도가 일방적으로 밀렸던) 전력이 있어서죠.

근데... 힘 없으면 좆뙌다는거야 뭐 그렇게 세삼스러울 부분은 아닙니다만... 이 엽기 짜장면들에게 우리가 재래식 군사력으로 밀린다고 스스로 자괴감에 빠질 필요는 없습니다. 핵 딱총 몇발 가지고 우리와의 군사력 격차를 좁히겠다고 아우성인 위쪽 동네가 문제지... 고강도 무력분쟁이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미친 짓 그만하자는 이야기가 나올 만큼의 빠워는 우리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뭐 지네들 포털에서 시비거는 짜장면들을 비웃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잡것들이 티벳에 어떻게 하는지를 똑똑히 보면서... 저게 한반도의 북쪽에서도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만큼은 꼭 기억해두셨으면 합니다.

2월 17일 FT기사전문

Seoul needs sound policy, not soundbites
By Aidan Foster-Carter, FT.com site
Published: Feb 17, 2008


Regime change in Korea? This conjures up the Bush administration's imperial fantasies of what it once dubbed the "axis of evil" - before George W. Bush turned turtle and started talking to Pyongyang in a bid to score a foreign policy success somewhere.

With Kim Jong-il still in situ, it is the other Korea where regime change is imminent. Lee Myung-bak, a conservative former chief executive of Hyundai and mayor of Seoul, elected by a landslide in December, will be inaugurated as South Korea's president on February 25. His appointment ends a decade of centre-left rule in Seoul under Kim Dae-jung and Roh Moo-hyun.

Mr Lee is allowed only a single term, so he has five years until 2013 to reshape his country. His transition team has already issued a dizzying welter of new initiatives. Pro-business and dynamic - nicknamed "bulldozer" from his Hyundai days - Mr Lee is widely seen, not least in Washington, as a welcome change from his jejune and prickly predecessor Mr Roh.

Many of Mr Lee's ideas make sense. He will mend fences with the US and with Japan, with no more apologies demanded for pre-1945 iniquities. English, which all Koreans learn but few speak, will be pushed at all levels. Government is to be slimmed and red tape cut. Privatisation, which slowed under Mr Roh, is set to resume. Like Mr Roh, Mr Lee supports early ratification of last year's free-trade agreement with the US, though neither side's legislature may oblige.

Yet there are danger signs. Mr Lee's "747" slogan pledges 7 per cent annual growth in gross domestic product, to boost per capita income to $40,000 and create the world's seventh largest economy. But how can this fly? Seven per cent growth is a tall order for a big industrial economy at the best of times - let alone with high oil prices (Korea imports it all) and a US recession looming. As for joining the top seven, which economy does Mr Lee believe South Korea can overtake?

Being pro-business sounds good, but which business? The mighty conglomerates, the chaebol, see Mr Lee as their man. He promises to end curbs that stop them owning banks. Yet with Samsung being probed for alleged bribery and other malfeasance, is giving these behemoths freer rein the way to go? Better, surely, to boost Korea's cash-strapped small and medium-sized enterprises, which are vital for the job creation Mr Lee also promises: 600,000 a year, no less.

What of foreign business? Mr Lee claims to welcome foreign direct investment, yet is critical of profit-taking. With the Lone Star fiasco still dragging on, this stance may not reassure foreign investors that they are as free and welcome to make money in Korea as Koreans are. Allowing the chaebol to buy banks suggests a state keen to build national champions.

Then there is his grand canal. Having beautified a long-hidden Seoul stream as a major amenity, Mr Lee plans a $16bn nationwide canal network. Almost all experts dismiss this as a white elephant. Yet Mr Lee is sticking to his guns, while promising consultation. If he goes ahead, this threatens to be a divisive distraction from Korea's real problems.

For a supposed free-marketeer, Mr Lee favours a very visible hand. While seeking to close four of 18 ministries, he plans to strengthen the powerful presidential Blue House at the expense of the prime minister. Many in Seoul would advocate the reverse.

If, as expected, national assembly elections on April 9 give Mr Lee's Grand National party a thumping majority, few checks and balances will be left on what looks like a chief executive's vision of government, even a new Korea Inc.

Omnipotence also means no hiding place. Mr Lee will be vulnerable if growth does not better the 5 per cent under Mr Roh. A special counsel is probing his past financial dealings. Any dirt it uncovers could help turn a bulldozer who fails to deliver on too many bold pledges into a lame duck.

South Korea's real problems run deeper than soundbites. They include jobless graduates - too many study the wrong subjects - and, above all, how to create a growth model to meet China's challenge. That entails boosting services, which means more FDI. Mr Roh, to his credit, saw this. Does Mr Lee?

For a new broom, he seems redolent of Korea's past. While drive beats drift any day, what Seoul needs is a brain surgeon, not a bulldozer.


The writer is honorary senior research fellow in sociology and modern Korea at Leeds University, England, and a freelance writer, broadcaster and consultant on Korea

ㅋㅋㅋ 요즘 유행한다는 댓글들.

"나 이명박 안찍었다"
 
747공약 ===> 7수있는 4기는 다 7테다
 
이 세상에서 제일 나쁜놈 ===> 이명박찍고 이민간놈
 
To 명박  "머리찾아가세요"  From 농심

초난감 기업의 조건을 읽다가 가슴을 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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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역사가들은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패한 이유가 전장에서 펼친 전략과 무관하며 세 인물이 빠졌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여기서 지칭하는 세 인물은 버티어 장군과 란 장군, 다부 장군이다. 나폴레옹의 수석 보좌관이었던 버티어 장군은 나폴레옹의 뜻을 해석해서 복잡한 명령을 간단하고 명쾌하게 하달하는 천재였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첫 번째로 망명한 후 그는 변절했으며 다시 되돌아오지 않았다. 버티어 장군의 후임이었던 수 장군은 전장에서 버티어 장군만큼 명쾌한 의사소통 체계를 구축하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프랑스 군은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란 장군은 나폴레옹이 틀렸다고 판단했을 때 코르시카인들과 대화를 기꺼이 재개할 정도로 명석했으나 워털루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아스펀 에셀링 전투에서 사망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에 맞먹는 지략가인 다부 장군은 그뤼시 장군이 패전했던 와브르에서 프로이센군을 박살내면서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승리할 가능성을 높였으나 워털루 전투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나폴레옹과 나폴레옹이 벌이는 끝없는 전투에 지쳤다는 이유에서였다. 황제를 지지하러 나온 장군들은 대부분 용감하고 유능했지만 관리계층에서 황제 직속은 아니었다.

잘 돌아가는 회사는 나폴레옹의 전성기와 흡사하며(현 CEO, 미래 CEO, 미래 경영진 모두에게 이 비유가 일으키는 전율을 음미할 시간을 잠시 주겠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비유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비즈니스는 전쟁이 아니다) 균형잡히고 우수한 관리팀이 존재한다. 성공한 첨단 기술 기업을 살펴보면 흥미롭게도 많은 기업이 적어도 한동안은 "쌍두마차" 시스템을 따른다. 본질적으로 두 사람이 CEO역할을 공유하면서 한 사람은 기술적 측면에, 다른 사람은 비즈니스 측면에 집중하는 시스템이다. 유명한 예로는 게이츠/발머, 워노크/게스케(어도비 창립자), 잡스/워즈니악, 쿡/프라울스(인튜이트사 창립자)가 있다.

CEO가 책임을 분리하든 안 하든, 회사는 정신 상태가 다양한 관리층을 구성하고 관리할 필요가 있다. 자바 구현이나 부기 능력과 같은 구체적인 기술이 다양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어 팔려고 나섰다면 기본적인 역량은 갖추었다고 가정하겠다.

여기서 말하는 "다양성"은 팀이 가지는 정신 상태, 그러니까 각자가 자신의 능력과 야망을 발휘하는 방법을 가리킨다. 많은 기업에서 창립자와 CEO는 자신과 꼭 닮은 경영진을 만든다. 각 구성원을 둘러보면 창립자와 CEO를 약간 왜곡한 얼굴들이 찬성과 지지가 담긴 미소를 되돌려 보낸다. 이런 분위기라면 회사 경영진은 거의 종교 집단처럼 행동하게 된다. 그 나물에 그 밥인 사람들은 자기 도취적인 태도로 나머지 회사 조직과 시장으로부터 점차 단절되기 십상이다.

또 다른 극적인 예제는 경영진이 로마 전성기 콜로세움과 유사하다는 관리이론이다. 주기적으로 경영진은 회사 창립자나 CEO가 지켜보는 가운데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인다. 흔히 이러한 관행을 합리화하는 명분은 다윈의 진화설이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격려하는 분위기 속에서 좀더 강인하고 우수한 임원이 살아남는다는 이론이다. 하지만 결국 경쟁사보다 동료 죽이기에 더 능숙한 관리자가 살아 남을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고려하지 못한 듯하다.

내가 몸담았거나 관찰한 관리 시스템 중 최고는 어느 극단도 아니다. 정신적으로 다양한 그룹을 효과적인 그룹으로 아우르는 시스템이다. 내가 판단하기에 최고 팀에는 다음 구성원이 항상 존재했다.

  • CEO의 아이디어와 비즈니스 목표를 나머지 조직과 아래 관리층에게 성공적으로 전달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 '버티어 장군'

 

  • 비즈니스 자질과 능력에서 CEO와 맞먹는 사람, 지도자가 전투력을 잃는 위기 상황에서 회사를 운영할 수 있는 사람, 하지만 언제든지 기꺼이 자기 역할로 물러나서 지시를 받을 수 있는 사람. '다부 장군'.

 

  • 권한이 주어졌을 때 상부의 가정과 믿음에 두려움 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 '란 장군'

 

  • (회사 재무를 포함하여) 회사의 병참학적 필요성과 능력을 확실히 파악하는 사람. '웰링턴'(나폴레옹과 그의 참모진이 병참학의 중요성을 납득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 패배한 기록으로 잘 드러난다).

<초난감 기업의 조건>, 릭 채프먼 지음, 박재호 이해영 옮김, 에이콘. pp467-469

아스트랄 대한민국

대운하, 영어공교육... 총선 득표에 도움 안 될것 같으니 잠깐보류. 생각나는 4자성어. 조삼모사

각하 말씀. 영어몰입교육... 오해였다. 2MB정부는 '오해정부?'

10년간 출장갔던 공권력이 돌아왔다...? 뭐 임산부 두들겨팼던 넘들, 시위진압중 농민 패 죽인 전경들은 그 10년 사이에 등장하지 않았단 말씀? 왜들 기억력이 이 모양이지... --;;

손학규의 징크스. 밥에 뜸까지 들여놓고 항상 솥을 엎어버린다.

PS. 도대체 민새가 당 지도부의 뭔 약점을 잡고 있을 것일까... 전 그게 몹시 궁금합니다.

2008년 3월 19일 수요일

아리랑 TV의 아스트랄한 광고들

밖에 나가면 현지에 적응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이야기는 많이 합니다만, 그래도 한국 영화와 방송은 항상 반가운 존재들입니다. 뭐 인터넷 만능의 세상에 블로그까지 가지고 있다면 한국 소식을 한국과 별 차이가 없는 속도로 받아서 볼 수도 있긴 합니다만... 암튼...

그 소중한 존재에 항상 낑기는 것이 아리랑 TV입니다. 뉴스 나오죠... 드라마 나오죠... 뉴스가 80년대 KBS삘이 강하게 나서 그렇지... 뭐 그럭저럭 봐줄만 한데요... 보고있다보면 도대체 저걸 왜 틀고 있을까...란 생각만 하게 만드는 광고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사실 국정홍보처에서 만들었던 Dynamic Korea도 좀 깨긴 합니다만... 국가 이미지와 관련된 홍보물치곤 꽤 만든 편입니다.

문제는 너나 없이 만들고 아리랑 TV는 물론 세계적인 매체들을 통해 푸는 울나라 지자체들의 광고들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넘이 바로 경상북도의 광고죠.

외국인이 차를 타고 고속도로로 진입했는데 고속도로가 고속도로가 아니라 주차장인 상황. 이 아저씨 쫌 난감해 하다가 "아마도 경상북도의 기업지원센터라고 추정되는 곳"에 전화를 겁니다. 뭐 이리저리 빨리 사람들이 뛰더니... 뜬금없이 헬기가 그 외국인 차로 접근하면서 사람이 나와 손을 내밉니다. 그리곤 "Let's go together!"라는 구호가 화면에 아로세겨지고... 경북도 지사께서 팔뚝질 한번 해주시는 걸로 광고는 마무리됩니다.

이 줄거리를 보시고 이게 뭐하자는 광고인지 짐작이 되시남요?

전 이 광고를 꽤 많이 봤음에도 불구하고 뭐 하자는 이야긴지 모르겠더라구요. 아마도 "서울로 가는 길"이었을 고속도로에서 길이 막혔을때 콜센터에 전화하면 헬기를 보내주시겠다는 이야기인건가요?
아리랑 TV는 꽤 많은 나라들에 방영되는 만큼 사람들이 보는 목적들도 각양각색입니다. 제가 이걸 주로 봤던 네팔과 인도에선 기어가는 인터넷 속도 때문에 꿈도 못 꾸는 "MMORPG게임들을 저렇게 재미있게 할 수도 있다"는 것 때문에 청소년들이 주요 시청자군을 형성하고 있고... 한류가 꽤 쎈 동네들에선 K-POP스타와 같은 인물들의 최근 동정을 알아보는 쪽으로... 혹은 뮤직비디오를 보는 쪽으로 주요 시청자들이 몰려 있죠.

그런데... 그런거 감안 안하고 냅다 모호한 광고를 틀면... 그게 먹힐까요?

정작 비즈니스 프랜들뤼한 공간이라는 걸 알리고 싶었다면 70~80년대 수출기지였던 곳들이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었는지... 그래서 얼마만큼의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인지를 말하는게 나은게 아닐까요?

그럼에도... 이런 류의 광고들은 요즘도 계속 느는 추세더군요. 뭐 지사님께서 TV에 한번 더 나오는 거이 지자체 공무원들에겐 중요한 이슈가 될런지는 몰라도... 돈을 쓸 입장이나 보는 입장에선 "저게 뭐냐?"라는 이야기 밖엔 못합니다.

냅다 뛰기 보다는... 가만히 앉아서 좀 생각들을 할 시점인거 같은데... 어뤼버뤼한 각하까정 움직이고 계시는 판국에 그게 가능할런지 모르겠군요. ㅎㅎ

2008년 3월 16일 일요일

김일성, 박정희, 그리고 2MB의 공통점

포토제닉 정치의 달인들이라는 사실. 각하께서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중간에 세워 길에 구멍을 뚫어 직접 부실공사 여부를 확인하셨다는 박통시절이나, 어디 어디 현장지도에 나서서 인민들의 열화와 같은 환영을 받으셨다는 김일성이나... 도찐개찐이었던 시절이 거의 30년 전의 일이죠.

그런데... 요 명판, 거의 한달간 저를 불쾌하게 만들더군요... 위의 사례들이 연상되어 말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당선자 신분이었던 1월에 중소기업중앙회에 방문했다는 사진이야... 뭐 그렇게 특별할 것이 없었습니다만... "방문기념"으로 명판을 만들어놓는다는 것은 21세기의 풍경이라기 보다는 20세기 중반 즈음에 군사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혹은 아들에서 아들로 정권을 넘기는 후진국의 풍경에 훨씬 더 가깝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이런 사진들까지 굳이 볼 필요가 없었던 진 거사는 냉큼 이들의 공통점을 그대로 뽑아내더군요. "포토제닉 전시행정"이라고 말이졉.

연달아 3일 내내 각하의 뒤통수를 후려 갈기는 글만 쓰는 입장도 그렇게 유쾌한 것은 아닙니다만... 점점 더 시간이 지나가면 지나갈 수록 밀려오는 짜증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중소기업의 92%가 반대하는 정책을 펼치면서도 "중소기업이 살아야 한국 경제가 살아납니다"라는 글을 쓰는 분의 논리회로라는게 어떻게 포장되는지 보고 있어야 하니 말입니다....

핑계는 그만,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오린쥐 위원장님 같은 분은 이렇게 해야 이해하실지도 모르겠군요. "A pretext is never wanting."

아무래도 카테고리를 하나 새로 늘려야 하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각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주옥같습니다. 최근에 일하느라 정신이 없어 뉴스를 보지 않아서 더 많은 옥성들을 놓쳐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밥 먹고, 간만에 퍼져서 좀 쉬다가 인터넷 뉴스를 읽다보니 오늘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군요.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가는 시절에는 무엇보다 정치적 안정이 굉장히 필요하다"

1996년 대한민국은 OECD에 가입합니다. 물론 UR은 물론이고 WTO협상과정에서 우린 아직도 "개도국" 대우를 해달라고 해서 여러 나라들의 눈총을 받고는 있습니다만... 순전히 말빨로 남의 것들을 챙겨와야 하는 '외교'라는 놀음이라 그런 것일 뿐이지, 그 나라가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르던 1990년대의 상황이랑 지금이랑은... 거리가 멀죠. 그런데... 중진국이라구요?

그리고 정치적 안정이라... 참... 그런 분들이 2004년에 헌정중단사태까지 일으키셨었습니까? 그리고 그 이후에도 우리가 지켜봤던 겁니다만, 어느 한 정당이 과반을 점유한다고 해서 '정치적 안정'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아니, 사실 벌써 싹수를 보여주고 계시는게... 과반을 설사 점유한다고 하더라도 '친박, 친이'의 차이에 따라 내부 갈등이 결코 해소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쉽잖은데... 과반이상을 확보하면 된다는 거. 그거 오만이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닐런지요?

더 깨던 이야기는 이겁니다.

"지난 10년 동안 참 국제환경이 좋았던 시절이 있었다"

각하, 어디 갔다 오셨어요??

지난 10년간 국제환경, 좋았던 적 별루 없습니다.

잊어버리고 계시는 것 같은데 DJ영감님이 집권했을땐 IMF구제금융 받았던 땝니다. 말 그대로 경제주권을 남에게 줬다고, 그래서 국민들이 집안에 있는 금덩어리들을 내놓으면서 나라를 살려야 한다고 하던...뭐 그런 시절이었죠. 그 와중에도 그 "피와 눈물의 덩어리인 금"을 가지고 외환위기를 일으킨 것이나 다름없던 이들은 돈벌이에 나섰었습니다만...

그럼 뭐 지금 봉화마을로 내려간 분이라고 해서 좋은 환경에서 취임을 했었냐.. 그럼 그렇지도 않거든요. 신용카드 대란을 수습해야 했고, "악의 축"이라며 카우보이 짓을 하고 돌아다니던 큰 나라 대통령 덕택에 유가는 그때도 100달러 선으로 급등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출범 20일임에도 사람들의 기대는 마치 6개월 넘은 정부에게 요구하는 것과 같다라고도 말씀하시더군요. 글쎄요... 제가 보기엔 본인께서 왜 집권하셨는지도 기억이 안 나시는 것 같습니다.

각하, 혹시 이 동영상 기억하시나요?





저 동영상에서 청년은 이렇게 말합니다.

" 우리의 10년은 날고 싶은 새들의 날개를 확 꺾어버린 잔인한 시간이었습니다. 사람답게 살려면 일자리가 필요합니다. 자존심을 지키는데도 사랑을 지키는데도 일자리는 필요합니다..... 목 마른 사람에게 오직 갈증을 해결해줄 물만이 필요합니다.

이번 선거에서 저는 비정규직의 설움, 청년 백수의 불안을 누구보다 잘아는 사람, 청년 백수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제 소중한 한표를 줄 생각입니다.

부지런하고 정직한 사람이 잘 사는 나라, 일자리 넘치고 중산층이 두터운 나라를 약속한 ooo후보,

전 당신의 약속을 믿습니다. 제발 절 살려주이소!"

대선과정에서 각하께서 살려주실 것이라고 저렇게 확신을 하던 이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보여주신 것보다는 잘 안되는 것은 모두 전임자의 탓이라는 말씀만 하셨죠. 저 동영상을 보면서 얼마나 다급한가라는... 그런 생각을 했던 처지에서 각하의 말씀은 무~척~ 한가해보입니다.

각하, 제발 핑계라는 꼼수는 그만 쓰시고...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네?

2008년 3월 15일 토요일

각하, 엔간히 하시죠?

후임자가 뭔가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을때 가장 쓰기 좋은 수단은 무엇일까요? 직딩 생활이 좀 되는 분들은 금방 답 나올겁니다. 전임자를 까는거죠. 하지만 이것도 인수인계과정을 법적 지위로 보장된 곳에서 벌인다고 한다면 좋은 이야기 하기 참 거시기 합니다.

오늘도 각하께선 "아직도 야당생활하는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하시더군요. 컴터가 포맷되어 들어왔다고, 그래서 업무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뭐 그러시면서 하신 말씀인데... 아래의 짤방을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미국 드라마 West Wing의 7번째 시리즈의 마지막 에피소드의 시작에 나오는 장면이죠. 부통령의 비서실장이자 시즌 6에선 자쉬와 치열한 선거전을 벌였던 Will Bailey(Joshua Malina 분)의 컴터에 붙어 있는 내용입니다. 기록물 보관소 등의 아카이브로 모든 내용이 저장되었음이라고 쪽지가 붙어 있죠...

뭐 컴터 화면은 켜지지 않냐구요? 켜지죠. 근데 민간기업에서 활동하신 분들이 없어서 그런지, 전임자 다음으로 후임이 되었던 적이 없는 분들만 청와대에 계시는거 같더군요.

원래 퇴사하기 전엔 회사에서의 각종 문서들을 정리하고, 인수인계를 위해 페이퍼를 작성하며... 인수 인계를 완료한 다음에는 컴터를 포맷하고 윈도와 필수 어플리케이션만 딸랑 남겨주는 법입니다. 저 역시 몇 번 회사를 옮기면서 이걸 했었고, 업무의 특성상 회사 서버와 관련된 내용이 있었을 경우엔 아예 메뉴얼로 만들어서 줬었습니다.

그런데... 청와대에서 준 메뉴얼이 대단하다고 호평 일색을 늘어놓던 신문들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더군요. 노통은 자신감있게 넘겨줬다는 내용들이 정작 필요있는 것들은 별루 없었다는 기사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합니다.

글쎄요...? 그런데 기사 내용에서도 나오는 겁니다만... 오린쥐 위원장님께서 전화비를 얼마를 낮추네 뭐네 그러면서 삽질을 하시는 동안, 정작 필요한 자료들은 다 확보하고 있으니 안 받겠다고 했다는군요.

이건... 자세의 문제에 앞서 10년 전에 IMF로 절딴 났던 나라를 그 대로 인수받은 것이라고 착각했던 그 분들의 잘못이지... 넘겨준 사람들의 잘못으로 보긴 좀 어려운 것 아닌가요? 아무리 특권이라고 하더라도... 이게 몇 번 반복되게 되면 일반 직딩들은 '업무능력'에 대해 가혹한 평가를 받음은 물론이고, 까딱 잘못하다간 그 회사 명의의 의료보험증을 생각한 것보다 빨리 반납하게 되는 수도 있는데... 청와대는 그렇지 않는가봅니다.

참... 5년간 얼마나 더 많은 핑계거리들이 필요할지... 참 기대해마지 않는 바입니다.

각하, 며칠 동안은 그런 식의 핑계를 대는 것도 가능하긴 하지만 말이죠... 이거 좀 길게 하시면 추해보일 뿐만 아니라... 업무능력을 의심하게 된답니다. 그거 원하세요? 엔간하면 그만 하시죠?

2008년 3월 14일 금요일

DSLR의 함정

1) 며칠 전

보관에 문제가 있는 짐들을 정리했던 날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1학년때 샀던 펜탁스 80~200 줌렌즈 케이스를 버렸더니 그걸 보고 누군가가 묻더군요.

"카메라 뭐 쓰세요?"
"Pentax쓰는데요?"
"K10D시겠군요?"
"아뇨... K100D쓰는데요?"

뭐... 대충 이렇게 흘러가면 백이면 백 렌즈는 뭐가 어떻구하는 쪽으로 이야기는 흘러갑니다. 근데 말이져... 못 찍은 사진들은 아니라고 생각해 지금까지 사진들을 올려왔습니다만... 저 거의 대부분의 사진들을 번들렌즈로 찍었습니다. 수동 렌즈를 쓰는 경우들도 많았지만 말이졉. 사실 Pentax K100D면 똑딱이랑 비슷한 수준의 가격대를 가진 넘입니다. 그럼에도 남의 사진들 보다보면 뽀대는 졸라 좋은 분들의 사진이... 글쎄... 돈값을 하는지 잘 모르겠더군요. ^^;;

2) 연초 동창회

목동으로 이사한 선배가 대학 PC통신 동아리에서 활동하던 이들을 몽땅 불러모았습니다. 이제 15년으로 달려가는 이 모임에서... 또 사진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부른 선배 말씀...

"며칠 전에 쓰던 니콘 정리하고 캐논으로 알아보고 있어."

여기서 또 렌즈가 어쩌구... 가 나오는 걸 보고... 제가 그동안 찍었던 것들을 랩탑으로 보여드렸더니... 신기하게 보시더군요. 싸구려로도 그만큼 찍었다는 것이 못내 미덥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 저에게 Pentax K100D를 권했던 후배 녀석이 이런 말을 하더라구요.

"카메라, 특히 DSLR은 사용자가 얼마만큼 기능들을 충실하게 쓰느냐 마느냐에 따라 사진의 질이 달라집니다요..."

3) 2006년 11월 용산의 카메라 매장

K100D를 사겠다고 맘 먹고 찾아간 매장에서... 카메라가 오길 기다리는 동안 이 친구들이 뭘하나 커피 홀짝거리며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물려있는 6대의 컴터들 중에서 하나는 회계장부 돌리고 있고 나머지 5대는 모두 알만한 DSLR동호회에 다들 접속해있더군요. 대충 오가는 이야기들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어... 얘 XXX 동호회의 포인트가 얼마밖엔 안되는데 이걸 팔겠다고 하네...? 돈 넣어 말어~"

다른 넘들은 어느 카메라엔 어느 렌즈가 좋다는 이야기들을 올리기 바쁘더군요.  

뭐 아는 분들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전자제품 회사들이 DSLR사업에 뛰어드는 이유는... 요게 팔아먹을 엑세사리들이 장난 아니게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뽐뿌질이 가장 화려하게 벌어지고 있는 곳들은... 바로 그런 동호회들이죠.

사실... 사진이라는 건... 결국 빛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이 빛을 화가들은 어떻게 처리를 했었는지, 그리고 거장들은 어떻게 처리를 하고 있는지... 그런거 배우러 다니는 분들은... 글쎄요... 저두 동호회에 가입해놓고 필요한 물건이 있을 지 몰라 장터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의 점수만 올려놓은 상태이긴 합니다만... 동호회에서 무슨 전시회 하는데 같이 가자... 이번에 어떤 책이 나왔는데 딥따리 좋더라... 이런 이야기들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용팔이들의 장삿속에 넘어가... 막연하게 좋은 렌즈면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많지만... 정작 좋은 사진을 찍는 이들은... 빛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는 거... 그거 한번쯤은 생각해두셔야 하지 않을까요?

2008년 3월 13일 목요일

각하의 "공무원=머슴"이라는 말씀에 대한 소고...

요 며칠간 엑셀시트와 노트페드, MS워드를 오고가며 정신없이 문서작업만 하고 있습니다. 배고픈줄도 모르겠다가 얹혀 있는 후배 집에 들어가서야 배고프다는 걸 깨닫고 정신없이 밥 먹고 나면 잘 시간입니다. 뺑뺑이 좀 제대로 돌고 있는 셈이라 뉴스 볼 시간도 없고, rss리더로 묶어놓은 블로그들만 챙겨보고 있는 상태죠.

그런데... 최근 각하께서 "공무원은 머슴처럼 국민을 섬겨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다고 하더군요... 대학 다닐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이거 '개발도상국'이라는 딱지를 일종의 '방어수단'으로만 행사했을 뿐... 실제 객관적 국력으로 놓고보자면 세계 10위권 내에 들어가는 넘의 나라가 아직도 봉건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걸... 뭐 그런 걸 증명하는 사례들 중에 하나죠...

우리의 노동현실들을 수량화하면 노동시간은 존니 긴 대신에 단위 노동생산성은 미국의 50% 정도에서 왔다갔다 합니다. 그럼 걔네들의 노동강도는 어떠냐... 하면 그게 그렇게 우리처럼 정신없이 움직이는 형태는 아니거든요?

이런 이야기해봐야 너 문빠 아니냐는 소리나 듣기 딱 좋으니... 뭐 그냥 그러려니 라고 넘어가려고 해도... 대학 다니면서 "식민지 반봉건" 혹은 "식민지 반자본"과 같은 형태로 우리 사회를 보던 넘들이 생각나... 신물이 올라옵니다.

2008년 3월 12일 수요일

재미있는 현상

이전의 블로그인 http://blog.empas.com/rainmaker10 의 방문자가 많은 경우엔 이곳의 방문자가 적고, 저쪽의 방문자가 적은 경우엔 이쪽의 방문자가 많은 현상이 반복되고 있네요. 이사를 해놓고도 뭔가 아쉬운 느낌이 계속 있는건... 이런 현상들이 좀 나타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ㅋㅋ

春來不似春

오늘 갑자기 생각난 한시... 한 토막.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自然衣帶緩(자연의대완)
 非是爲腰身(비시위요신)”


“오랑캐 땅에는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자연히 옷의 혁대가 느슨해지니
 허리와 몸을 위해 옳지 않다.”
                           
-王昭君 (前漢 11대 元帝 c. B.C 33)-

2008년 3월 11일 화요일

묵시록적 입장

언젠가 어느 경제학자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일본의 경제학자, 기업인 보고 "어떻게 해서 지금의 고도성장을 이룰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학회에서 했던 적이 있었는데... 돌아온 대답이 이랬답니다. "2차 대전 이후 살아남기 위해 기십년간 발버둥치고 보니 지금에 와 있었더라."

대답이 좀 깨는 이야기긴 합니다만... 사실 숫자로 계량화되는 것들은 회계사나 자료를 찾는 사람들의 눈에만 들어오는 것이지, 살아가기에 바쁜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건 거의 없죠. 이건 우리의 경우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데... GDP로 놓고보면 우리가 계속 스페인을 추격하고 있는 형상입니다. 그럼 이것이 수십년 전부터 그랬던 거냐... 하면 그거 아니거든요.

우리나라의 경제정책을 세우는 사람들은 '한국적 규모로는 농업의 미래는 없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심다만... 스페인의 수출품 중 중요한 것들 중에 하나가 '농업'이고, 이 농업에서도 제주도만한 섬 7개에서 생산하는 농산품이 전체 농산물 수출량의 절반을 차지합니다.

노무현 정부들어선 이게 또... 제조업까지 확장되더군요. 제조업으론 일본을 따라잡기 어렵고, 중국이 겁나 쫓아오니까 다른 산업부분을 어떻게 해서 10년 먹을 거릴 만들어야 한다... 뭐 이런 헛소릴 했었는데요... EU 소속의 쫌 산다는 나라들은 모두 농업은 물론 제조업 비중이 절라리 높습니다. 제조업으로 한 칼 그리는 독일도 농업을 포기하지 않으며 농업으로 한칼 그리는 스페인과 프랑스 역시 제조업을 포기하고 딴 넘을 찾겠다는 아스트랄한 행태들은 안합니다.

이렇게 EU이야기를 하면... 유럽식 비효율성, 늙은 대륙... 뭐 이따위 이야기들을 하고 있심다만... 세계 경제학 교과서에 "국가 GDP는 자연을 파괴해도 올라가고, 그 파괴된 넘을 복구하기 위해 돈을 넣어도 올라간다"는 사례를 만들겠다고 덤비는 분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찬연한 미래에 비하면 훠얼씬 낫심다. 샤르코지가 2MB각하와 비슷한 입장을 가진 양반입니다만... 그래도 그 아저씨 내각엔 74년 여성 엔지니어가 들어갈 정도로 그 폭은 넓으니까요. 1조원짜리 내각이랑은... 비교하기 그렇죠.

그럼 그 개풀 뜯어먹는 소릴하고 있는 분들은 뭘 보고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까요? 학교 댕길때 고전은 안 읽고 팜플랫을 읽는다고 한 소릴 많이 들었었는데... 지금 울나라 경제 정책을 쥐락펴락하겠다는 분들, 사실 미국 극우들의 팜플랫을 무슨 경제학 고전쯤으로 착각하고 있는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이 경제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어떤 일이 발생될 것이냐... 면...

참여정부보단 훨씬 더 간단하고도 쉽게 예측을 할 수 있져. 지자체 선거때까지 얼마만큼의 문제의식을 가진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지... 그게 문제가 될 겁니다. 근거요? 이 글 함 읽어보시죠?

아참... 이틀 연달아 2년이 안 갈 것이라는 이야길 올려놓는 이유가 뭐냐구요? 알리바이용입니다. ^^ 지켜보자는 분들이 절반이 넘고, 이런 입장들을 써놓을 수 있는 공간이 없는 입장에선... 이렇게라도 해놔야 나중에 할말이 생기죠. 묵시록은 묵시록일 뿐이라구요? 그럼 아마 5년 뒤의 노벨 경제학상은 2MB 경제정책도 성공할 수 있다는 사례를 정리하는 경제학자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이 확률은... 글쎄... 제가 로또 1등 먹을 확률보다도 낮을 거라고 보거든요. ^^;;;

2008년 3월 10일 월요일

중국 진출 기업들이 직면하는 숨겨진 문제.

공산당은 나쁜 것, 그냥 적... 뭐 대충 그런 식으로 보시는 분들은 사회주의 국가들이 앞장서서 외자유치에 나서고, 사회주의라기 보단 자본주의적인 형태로 자신들의 사회체제를 바꿔가는 것을 보고 자본주의의 승리라고 마냥 뿌뜻해 하시더군요.

글쎄요... 한 사회가 어떤 이념을 선택하느냐의 문제는 사실 그 사회가 어떤 정치세력을 선택했느냐의 문제로 봐야 하는게 아닌가 싶은 입장에서 보자면... 이런 시각들은 나이브 하기 그지 없다고 봅니당. 사실 인과관계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하구요.

이런 이념이라는 선글라스로 세상을 바라보던 시절, 그러니까... YS때까지도 안기부가 기획을 하고 전경련이 돈 대줘서 전국의 대학 학생회 간부들을 중국 관광을 시켜줬던 적이 있었습니다. 목적은 좀 빤했죠. "너희들이 말하는 사회주의가 그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도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그걸 계속 이야기할래?" 뭐... 대충 이런거였거든요.

물론 학생운동이 맛이 가면서 부턴 이런 호사도 동시에 없어지긴 했었습니다만... 중국현대사를 살펴보다보면... 이들이 왜 홍군을 지지했는가... 그리고 흑묘백묘를 이야기한 덩 샤오핑의 집권이 어떤 경로로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전혀 다른 해답들을 얻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마오쩌뚱을 붉은 중국을 세운 사람 정도로만 알고들 있으며 덩 샤오핑과 같은 테크노크라트들과 적대적인 관계만 유지했다고 이해하죠. 하지만 마오가 자기 아들까지 희생시키며 한국전쟁에 이른바 '의용군'을 파병(국가적으론 파병이었지만, 자발적으로 간 거니까 자신들과 직접적인 상관은 없다...는 눈 가리고 아웅했죠)해야 했던 이유들을 살펴보면... 이 나라의 지도부가 경제발전을 얼마나 갈망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나름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것을 하고 국민당을 대만으로 쫓아내는데 성공하자마자 중국 지도부가 직면하게 되었던 상황은 기근이 들어 수십만명이 굶어죽는 사태였습니다. 어서 사회주의적 경제 발전을 이룩해야 한다고 똥끝이 타들어오는 상황이었던거죠. 그래서 스탈린에게 사회주의적 경제 개발을 위한 지도원들을 파견해달라고 하는데... 스탈린 입장에서 보자면 '농민이 주도하는 중국식 사회주의'라는게 아무래도 짝퉁 같아 보이는 겁니다.

소련에서 여하간의 지원을 하기 시작했던 것두 마오가 자신의 아들까지 잃고, 수십 수백만명의 중국인들이 한국전쟁에서 목숨을 잃고 나서부터였죠.

그것도 제대로 기술전수 같은 걸 해줬냐...면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대부분 와서 중국의 현실을 비웃기에 바빴었죠. 중소국경갈등 등을 '공산주의자에겐 조국이 없다'는 공산당 선언이 실제와 사맛디 아니한 사례 정도로 해석하는 걸 외우라고 가르치던 우리의 윤리교과서와는 달리, 실제 갈등의 원인은 이 과정에서 나름 대국이라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중국인들의 자존심이 시궁창에 처박혔기 때문이었죠...

문화대혁명(이라고 쓰고 문화대동란이라고 읽습니다. ^^;;)조차도 사실 마오가 나름 경제 발전을 위해 추진했던 대약진 운동이 대재앙으로 끝나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났고... 그 권력을 다시 찾기 위해 벌였던 엽기 행각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면... 덩 샤오핑의 흑묘백묘 그 훨씬 이전부터 중국 공산당 지도부에게 경제 성장이라는 것은 핵심적인 문제였습니다.

이경숙 전 인수위원회 위원장이 미국 유학을 갈때 숙명여대 교직원들이 김포공항까지 가서 환송을 해줬다죠. 그런 압박감을 가지고 미국에 유학갔는데 오린쥐 하나 슈퍼에서 사질 못했으니 얼마나 갑갑하셨겠습니까? 70년대 말 유럽의 캠퍼스를 접수하기 시작했던 중국산 유학생들은 한 대학의 교직원들이 아니라 '당'에서 보내줬던 이들입니다. 이들이 얼마나 절박한 심적으로 공부하고... 또 조국으로 돌아가 뭘 어떻게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을지 짐작가는 바가 없으신가요? 나이브한 서방 시각으론 "쟤네들 망명하면 우짠다냐?"라고 물었을때 이들은 "우린 인구가 많아서 몇 명 토껴도 상관없어"라고 대답했지만... 정작 가서 공부하는 이들은 '조국 경제를 새롭게 건설하기 위한 중대한 사명을 안고' 공부하러 갔던 것이었으니... 망명은 이들의 안중에도 없었죠. 중국 공산당도 이걸 잘 알았구요.

이런 성과들이 실제 쬐끔씩 시작했던 것이 1980년대였고... 그 성과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지 벌써 2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올해는 북경 올림픽이 있죠. 그들이 좋아하는 숫자 8이 연달아 세 번 반복되는 날로 개막식을 잡았다죠... 그들에게 이번 올림픽은 그냥 세계인의 스포츠 축제라기 보단... 그 절치부심의 세월동안 자신들이 쌓아올린 것을 세계 만방에 선포하는 초특급 이벤틉니다.

얘네들의 이런 사정에 대해 우린 과연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요?

중국 진출 중소기업들, 대부분이 저임금을 바라보고 들어갔었죠. 뭐 최근엔 "10억에게 신발을 팔아도 그게 어딘데?"라는 분들이 들어가셨습니다만... 자신들이 내심 경멸해 마지 않는 까오리팡즈(원랜 고구려인, 고려인을 칭하는 말인데 우리가 가끔 짱께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용도로 쓰임다)들이 그동안 깝쭉거렸던 것을 pay back하겠다고 하고 있지 않을꺼 같으셨나요?

사실 이런 정황에 대해 가장 정확하게 파악하고 대비했어야 하는 분들이 불과 10여년 전까지 '사회주의 조또 아니라는거 좀 배우고 와라'라고 대학생들 관광 보냈던 분들이었는데... 뭐 우짜겠습니까. 남의 나라의 상황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페널티를 중국에 공장 차린 중소기업인들이 가장 먼저 받는 것일 뿐이죠.

명색이 사회주의 체제에서, 그리고 극심한 빈부격차로 최악의 경우엔 흙을 먹고 살던 이들의 지지가 있어서 집권했던 이들이... 내수 경제의 크기를 키우겠다고 나서는 것은 당연한 경로였을 겁니다. 싼 인건비가 결코 싸지 않은 인건비가 되고, 더불어 최근의 원자재 난까지 겹쳐지게 되니... 현지에 진출한 중소기업들로선, 더군다나 이익율을 대기업들에 가져다 바쳐야 하는 것과 다름 없었던 최근의 상황들을 보면... 견디기 어려웠겠죠.

그럼... 이게 언제 모든 기업들로 연결되어 갈까요? 아마... 그게 2MB 정부의 명운을 가르는 시점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2008년 3월 9일 일요일

도대체 뭐냐... --;;;

친구가 블록질을 시작한게 몇 달 되었습니다. 디지털 매체로 CD가 미래를 보여준다고 하던 시절에 IT바닥에 들어와 이름만 들으면 알 수 있는 회사들을 거쳐 지금은 PG쪽에서 일하고 있죠. 친구야 뭐 빠방한 자료를 가지고 글쓴다고 부러워하지만 사실 그거 전에 Wiki와 브리테니커를 가지고 정리해둔 것들을 가지고 긁적거린 것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아는 입장에선... 그리고 현지에서 몇 가지 힌트들을 얻었던 내용들이 다른 글들과 조금 다를 수 밖에 없기에 글 올려놓고 나서 항상 쪽팔린다는 생각들 밖엔 안합니다...

사실 전 제가 궁금한 것들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하면 갑갑증이 도지는 중증질환이 있는지라... 제가 궁금한 것들에만 집중하지... 남에게 보이는 것들은 그렇게 신경쓰는 편이 아니죠.

반면 이 친구의 경우엔 워낙 남이 읽어야 하는 글(기획서)를 주리줄창 만들어온 처지라(그것도 제가 생선팔이에서 개발되지 않은 ASP를 팔러 다닐때까지) 아무래도 깔끔하게 정리해... 간단하게 보기가 훨씬 쉽습니다.

그러니... 티스토리로 이사오고 나서 이 친구의 카운트가 항상 앞설 수 밖에 없다는 걸... 뭐 솔직히 인정하고 지나가고 있지만... 그래도 10~100 단위로 며칠 밀리니까 맨날 지네... 뭐 그런 느낌이 없는 것두 아니죠. 거기다 이 친구는 블로그 뉴스로 내보내고 있지도 않은데... 말이졉. ^^;;

그런데 은근히 신경쓰게 되고, 경쟁하게 된다는 이야길 친구가 자기 블로그에 올려놨더니 어떤 띨띨이가 그걸 '카운트 조작'으로 이해했던 모냥입니다. 참... 밥 벌어 먹고 바쁜 판에, 그리고 뭔가 정리된 넘을 만들기 전에 정리해놓는 공간 쯤으로 쓰는 사람끼리 그냥 하는 이야기를 존나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종종 보면... 도대체 니네 뭐냐...? 란 질문을 안 할 수 없게 됩니다. 이것두 일종의 스토킹이라는건 인지하고 있는 걸까요?

2008년 3월 8일 토요일

네팔 정치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 몇 가지3

거의 3일동안 이걸 쓰게 되네요. 순서는 이게 첫 번째고, 이게 두 번째이며... 이 글은 마지막입니다.

5) 터져나오는 요구 & 부정부패 & 리더십의 부재

네팔에 있었을 때 이전의 블로그에 마오들의 대장인 프라찬다를 두고 '네팔에서 가장 성공한 벤처 기업가'라고 비꼬았던 적이 있습니다. 학교 선배랑 그걸 가지고 약간의 마찰이 있었었죠. 뭐 최근의 제 입장은 인민의 복리를 해결하지 못하는 좌파는 좌파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말 다툼이 약간은 격해졌었죠.

2006년 2월, BBC와의 인터뷰에서 프라찬다는 네팔의 3/4를 사실상 통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트만두로 진격할 수 없는 이유를 이야기했었습니다. 2001년경부터 본격화된 미국의 군사적 지원, 그리고 인도와 네팔이 맺고 있는 군사조약, 절대로 '마오주의자'라고 안 부르고 '반군'이라고만 부르는 중국 등이 본격적으로 개입할 빌미를 주면 빈약한 무장을 하고 있는(그 흔한 AK-47조차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었죠) 그들의 입장에선 상황 자체가 어려울 수 밖에 없다는... 나름 현실주의자라는 메시지를 전달했었는데요...

83석의 의석을 배정받고 연정에까지 참여했었음에도 이들의 궁극적 목표는 인민전쟁을 선포했던 당시의 40개 조항을 어떻게 해서든 완수하겠다는 의지를 결코 숨기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자신들의 신념에 충실하면 충실할 수록... 지지세는 하락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죠. 40개 조항이 이념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네팔 사람들이 보기에 그게 당장의 자기 삶을 향상시켜줄 것이라고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나라가 가장 열악한 부분은 무엇일 것 같습니까? 청빈, 안빈낙도 등등의 멋있는 말이 많지만 '나라'가 가난할 경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인프라입니다. 물, 전기, 가스 등등의...

어떤 면에서 보자면 네팔은 이런 인프라 구축과 관련해서 나름 나쁘지 않은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력발전으로 대부분의 전기를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이 생산한 전기의 상당부분을 인도로 수출하고 있습니다. 2.5백만MWh를 생산해 그 중에서 1/20을 인도로 수출하죠. 그리곤 다시 그 두 배를 수입하고 있습니다. 언뜻보면 삽질 같아보이는 이 짓을 반복하는 이유는 갈수기냐 몬순이냐에 따라 유량의 차이가 많기 때문입니다. 전기 에너지는 대규모로 저장할 수 없잖아요? 박형진 중령이 가족들에게 보낸 이멜에서 최근엔 하루 8시간씩 정전이라고 썼었다죠. 지금이 갈수기이기 때문에 그렇고, 유량이 풍부한 몬순을 좀 지나면 일주일에 4시간 정도로 정전시간은 짧아집니다.

그런데 몬순을 지나면 일주일에 4시간 정도로 줄어든다는 것... 그러니까 유량자체를 일정하게 유지시킬 수 있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이야기죠. 그러니 '대규모 댐'이 여러가지면에서 해답이 될 수 있을텐데요... 이건 이 댐이 들어서야 하는 지역의 부족의 이해와 카스트 갈등, 그리고 관료들의 부정부패가 서로 시너지(!)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카스트 제도도 여기에 한 몫을 단단히 하고 있죠. 교육 수준이 낮은 상태에서 "너희들의 그런 삶은 만세의 업(Karma)가 쌓여서 그런 것"이라고 종교적으로 묶여 있으면 답 없거든요.

인류가 지금까지 만들어온 정치형태중에서 민주주의가 아직도 그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사람들의 요구를 전면화시켜 이것들을 공동으로 해결한다는 것이죠. 이게 작동되려면 자신들의 요구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어야 하는데... 이게 교육수준이 지나치게 낮거나, 자신들의 요구사항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을 경우 갈등은 증폭되기만 합니다. 이 이야길 왜 하냐구요?

1990년까지 절대왕정이 이어져오면서 뭔가를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골로간다는 걸 의미했었죠. 그리고도 우여곡절 끝에 2006년에 들어와서야 '요구'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이게 교통정리가 되려면 '등가가치'를 가지는 것들끼리 교환이 되어야 하는데... 요게 쉽지가 않거든요.

2001년 센서스에 따르면 문맹율이 51.4%에 농업종사자가 전체 노동인구인 1천1백만중에서 76%에 달합니다. 네팔,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이쪽 지역의 끔찍하게 가난한 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가장 높게 나오는 것도 사실은 이들 대부분이 당장의 끼니 걱정이외엔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 조차 없으며, 교육율이 낮아 자신들의 처지를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규모 댐' 건설이 자신들의 삶을 전체적으로 향상시켜줄 수도 있다는 '미래'보다는 당장 끼니를 해결하고 있는 생계기반이 무너진다는 현실 밖엔 받아들일 수 있는게 없죠.

이게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지역이 바로 Tarai입니다. 인도에서 네팔 사람들은 별루 사람 대우 못받습니다. 비하르주 출신들과 함께 대부분이 막일에 종사하니까요. 실업률이 44%에 달하는 나라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인도로 일하러가는데... 경찰이 심심하다고 폭행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거든요(이 때문에 힌디를 구사하는 한국인들이 수난을 겪기도 합니다. 걔네들 눈엔 똑같은 몽골리안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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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의 농민들이죠. 몽골리안이라기 보단 아리안에 좀 더 가깝습니다.

이게 쌓이면 내부에서 비슷한 이들이 수난을 겪게 되죠. 인도계가 대다수인 Tarai지역이 문제가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죠. 그동안 상당한 수준의 차별을 겪어왔기 때문에 분리독립을 하겠다고 나서고 있는데... 네팔에서도 이 지역은 자원이 가장 많은 지역이며 동시에 교통요충지라는 것이 갈등을 격화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원래 암것도 없는 동네엔 사람들이 관심이 없지만 뭔가가 많은 동네는 그렇지 않은 법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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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비니 동산입니다. ^^;;;

코끼리 타고 코뿔소 구경하는 것으로 유명한 치트원과 석가모니께서 태어나신 룸비니가 바로 이 동네입니다. 야크보다 수익성이 좋아 염소로 가축을 바꾼 것 때문에 생태계 교란이 벌어지고 있는 산악지역과 비교하자면 이 동네는 천국이나 다름없죠. 일년 내내 농사가 가능한 지역이며 네팔의 유일한 시멘트 생산지이기도 합니다. 덧붙여... 네팔의 인도에 대한 무역의존도가 60%가 넘는데... 인도와 네팔을 잇는 도로가 여기거든요.

이들이 그동안 핍박받았던 것을 만회해야 한다고... 분리독립운동을 벌이면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수단은 길을 막아버리는 겁니다. 네팔을 여행하는 이들에게 길이 막힌다는 것은 룸비니나 치트원으로 가는 길이 조금 길어진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지만... 네팔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 길이 막힌다는 것은 석유, 가스등과 같이 생활에 필수적인 에너지 공급이 차단된다는 것은 물론이고... 제대로된 유리조차 수입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합니다.

제3자의 눈으로 보자면 이미 '연방공화국'으로 가는 것에 동의한 상태이기에 이들의 '분리독립'은 타협의 여지가 많을 것 같음에도... 이게 해결되고 있지 않죠. 가장 큰 문제는 한때 네팔 전체의 3/4에 달하는 면적을 실질적으로 지배했었던 마오이스트들이 정치력을 발휘해 이들을 통합시키는 쪽으로 활동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40개조항을 구현하는 쪽에 훨씬 더 열성이라... 국가통합보다는 이해의 충돌로 국가 전체를 끌고 가고 있다는 겁니다.

로멘스 영화에 불과했지만... Aaron Solkin이 초창기에 각본을 썼던 <대통령의 연인>이라는 영화에 이런 대사가 나오죠.

"지도력에 목마른 국민들은 너무 목이 마른 나머지 모래를 물인 줄 알고 마시고 있습니다." "아니, 그들은 그것이 물이라고 생각해 마시고 있는 것일세"

이런 네팔의 상황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동북아시아의 한 섬나라가 자동으로 연상되는 건... 제가 아마 그 나라 국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겠죠. 뭐 대충 이 다섯 가지 키워드가 지금 네팔의 정치상황을 이해하는 기초라고 봅니다.

2008년 3월 7일 금요일

네팔 정치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 몇 가지2

어제의 포스트에 이어 계속 씁니다.

3) 부족

히말라야의 가장 높은 봉우리 14개 중에서 8개가 있는 나라, 해발 4600미터 밑으로 내려오면 죽어버리는 동물(Yark)가 있는 나라... 그러니 실제로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땅은 전체 국토의 16.07%에 불과합니다. 물론 교역이야 계속 있었지만 상당히 독립된 형태로 이런 고지대에서 살았기 때문에... 부족별로 쓰는 언어, 종교는 물론이고 생활수준들까지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구가 총 2천8백만이 넘는 이 나라의 부족은 몇 개나 될까요? 100개가 넘습니다.

2001년 네팔의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체트리(Chhettri)가 전체 네팔 인구의 15.5%를, 브라만힐(Brahman-Hill)이 12.5%를, 마갈(Magar)이 7%를, 타루(Tharu)가 6.8%, 타망(Tamang)이 5.5%, 네와리(Newar)가 5.4%, 카미(Kami)가 3.9%, 야다브(Yadav)가 3.9%를 차지하고 있었다네요. 이 외에도 분류되지 않는 2.8%와 약 4.2%의 무슬림들, 기타 소수민족이 약 32.7%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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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꼬마 아가씨, 셀파족입니다. 현지에 살고 있는 한국분과 좀 관계가 있는 셀파족 결혼식에 가서 찍었던거죠.

상황이 이렇다보니 네팔의 뉴스를 별 생각없이 보고 있으면 쬐끔 황당하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죠. 왜냐구요? 다수의 부족어를 하는 아나운서 둘이 똑같은 뉴스를 각각의 부족어로 계속 반복해서 보여주거든요. ^^;;; 똑같은 화면이 다른 언어로 계속 지나가는 걸 함 상상해보세요.

물론 인도도 마찬가지긴 합니다. 공식언어만 16개다보니 인도 현지인 코디가 인도사람과 말이 안 통하는 당황스러운 시추에이션을 경험하게 되더군요. 하지만 인도는 워낙 땅덩어리가 넓다보니 지역언어로 진행되는 별도의 채널들이 있습니다. 이게 상대적으로 좁은(네팔도 우리보다 땅덩어리가 큽니다) 지역에서 벌어지니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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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의 부족분포도를 지도 상으로 표시한 겁니다.

이러한 다양한 부족들의 존재는 풍성한 민속문화를 자랑하게 만들기도 합니다만... 정치, 경제적으로는 갈등의 배경이 되기도 합니다. 사실 갈등의 배경은 이 부족들이 많아서 그렇다기 보단 별루 없는 나라(2007년 CIA가 추산한 구매력 기준의 GDP는 306억6천만 달러, 일인당 GDP는 1,100달러입니다)가 자원을 골고루 나눠가지기 보단 카트만두 분지 지역이 거의 대부분의 자원을 소모해왔기 때문입니다.

인도에서 종교분쟁의 가능성이 감지되면 네팔 용병부대가 투입됩니다. 어느쪽을 편들었다는 시비가 붙어버리면 제어하는 것이 불가능해질 정도로 폭동자체가 확산되어왔으니까요. 반면 96년부터 10년간 내전을 겪는 과정에서 네팔 왕정은 옆 나라의 잔머리 조차 배우질 않았었죠. 경찰의 과잉진압이 부족간 갈등을 촉발시키는 형태로 진행되었었으며 군대가 투입되고서부턴 이게 부족간 학살의 양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문젠 이게 내전이 끝난 지금에도 그 영향이 남아 있다는 거죠.

'집단적 증오를 영속화시키는 것은 여러 가지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제도들을 통한 사회화라는 과정 속에서 다른 집단에 대한 증오와 파괴의 이념이 집단적 기억으로 지속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허버트 허시가 이야기했던 건데요... 이게 현실 정치에서 응용이 될땐 '파편적 기억'으로만 작용하게 됩니다. 이걸 두고 '기억의 정치'라고 부르죠. 지금 네팔의 정치판을 끌고 있는 7개 정당들이 '연방공화국'으로 국가체제를 바꾸겠다고 하는 것도 자신들이 가장 강력한 세를 가지고 있는 지역을 포기하지 싫어서 그런건데... 이런 식으로 국가체제까지 바뀌게 된다면 '기억의 정치'는 종료되기 보단 오래 지속되는 형태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죠. 호남 싹쓸이와 경남 싹쓸이로 나타나는 우리 정치판과 비슷한 양상을 가질테니까요.

아참... 왕정종식과 더불어 없어질 위기에 있는 쿠마리 이야기도 여기서 빼놓을 순 없을 것 같네요.

미국에 갔다왔다가 잠깐 쫓겨났었던 이야기가 뉴스로 나왔던 적이 있긴 합니다만... 살아있는 여신으로 모셔지는 쿠마리는 네팔 왕가의 수호신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왕정종식과 더불어 없어질 상황에 있죠. 대략 5~8살 정도의 석가족 여자 아이들 중에서 선발되는 이 아이들은 초경이 시작되면 바로 그 직위를 잃게됩니다. 성장기의 아이가 제대로된 교육도 받지 못하고 신으로 모셔지다가 어느 순간에 민간인이 되어야 했기에 정상적인 삶을 가지기가 어려웠죠. 또 신으로 모셔졌다는 것 때문에 결혼도 못하고 처녀로 그냥 늙어갔었는데... 요즘은 국제구호기구등의 개입으로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가고들 있다고 합니다.

이의 유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힌두의 탈레주라는 여신이 인간의 몸을 빌어 아름다운 여인의 몸으로 카트만두 왕국에 나타나자 왕은 여신을 극진히 모시며 영원히 자신과 함께 있기를 바랬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신과 장기를 두던 왕이 음욕을 주체하지 못하고 덮치려 들었죠. 분노한 여신은 이승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구요. 뒤늦게 후회한 왕은 계속 기도를 했고, 그의 진심을 이해한 여신은 그에게 다시 나타나는 대신 초경을 겪지 않은 어린 여자아이를 선택해 자신의 분신으로 섬기기를 명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 왕은 여신이 제시한 조건에 맞는 여자 아이를 뽑아서 여신으로 섬겼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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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마리가 되는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몸은 보리수 같아야 하고 허벅지는 사슴과 같고, 눈꺼풀은 소와 같아야 하며 목은 고등 같아야 한답니다. 여기에 소, 닭, 돼지, 양 등의 머리가 피 냄새를 풍기는, 그것도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에 혼자서 하루를 지내야 신으로 인정받는다네요. 위의 사진은 이 쿠마리가 추는 춤인데요... 전문 댄서가 추는 걸 찍은 겁니다. 뒤에 히말이 어렴풋이 보이죠.

4) 군대

네팔의 군대, 밀리터리쪽에 쬐끔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바로 연상되는 부대가 하나 있습니다. 영국의Gurkha용병대 말입니다. 영국군이 받을 수 있는 거의 모든 훈장을 달고 있는 이 부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이 분의 글로 대체하겠습니다. 작년부턴 여자들에게도 문을 열었다는 케나다 Telegraph의 기사도 뭐 참고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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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명성이 있기에 수많은 나라에서 Gurkha용병대 출신들을 경비와 관련된 분야에서 최고로 우대해주죠. 싱가폴의 경우엔 주요시설물의 경비를 이들에게 맡기고 있을 정돕니다(위의 사진). 이외에 네팔군은 자국에 UN감시단이 들어와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많은 병력들을 UN평화유지군으로 파병하고 있는 나라들 중에 하나죠. 이들이 네팔로 송금하는 돈이 네팔 경제에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도 합니다.

근데 왜 얘네들이 지금의 네팔을 이해하는 키워드 중에 하나가 되어야 하냐구요? 지금의 네팔 상황을 다른 나라들로 대입해 놓고 보시면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 정도로 나라가 혼란스럽다고 한다면... 보통 이런 내용이 방송에 나오게 되잖아요... "은연자중하던 군부는...국가의 질서회복을 위해...어쩌구 저쩌구..."

실제로 2007년 트리듀번 국제공항 근처에서 살던 무렵, 네팔 중산층들과 몇 번 술 먹으면서 이야기를 하다보면 "지금의 네팔에서 민주주의는 사치품"이라는 말들을 꽤나 많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1987년 이후 억눌려졌던 모든 요구사항들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왔던 우리나라처럼 요구사항들은 많아지고 있습니다만... 문젠 이걸 교통정리할 정치가 안습이라는 겁니다. 특히 마오이스트들의 행패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입니다. 2007년 초, 네팔의 모든 상점들이 철시를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왜냐구요? 정당대회를 열어야 하니 기부금 받아야 한다고 네팔 상의 의장을 찾아가 말을 안 들으니까 두들겨 팼거든요. 이에 항의하는 사장님들이 문을 걸어버린거죠. 어제의 포스팅 마지막에 링크 걸어놓은 프레시안 기사에서 보시듯, 제대로된 나라를 만드는 것에 관심이 있다기 보단 어떻게 하면 자신들의 영향력을 키울 수 있을까만 골몰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니... 이쯤되면 군사쿠테타에 대한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겠죠.

특히 네팔의 군부를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집단은 네팔이 절대왕정체제로 들어가기 전까지 나라 전체를 좌지우지하던 '라나가문'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출동'을 결심한다면 군사쿠테타가 될 수 밖에 없죠.

하지만 네팔이라는 나라에 대해 조금 안다고 하는 사람들의 중론은 이것도 불가능한 시나리오라는 쪽입니다. 군사 쿠테타의 전제도 민심이 그만큼 받춰져야 하는데(우리의 5.16처럼), 네팔의 경우엔 너무 많은 피를 흘렸으며 군 자체에 대한 신뢰도 그렇게 높은 편은 아니거든요. 어떻게 보면 지금 이 혼란한 상황을 한꺼번에 바로 잡을 수 있는 집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니... 이 상황이 꽤나 길어질 것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네팔 정치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 몇 가지

1) 카스트(Caste)

"첫째, 인도 사회가 지금까지 존속해 올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카스트 제도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둘째, 국민의 화합을 위해서라고 하면서, 반드시 함께 어울려 먹고 마시며 계급간의 통혼이 허락되어야 하겠는가?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은 대소변을 보는 것 만큼이나 더러운 짓이 아닌가. 대소변을 볼 때 은밀한 곳을 찾듯이, 음식을 먹고 마실 때에도 은밀한 곳을 찾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셋째, 카스트 제도를 철폐하고 서구적인 사회 체제로 전환하는 것은, 인도인들이 카스트 제도의 핵심인 직종 세습의 원칙을 포기하여야 함을 의미한다. 직종 세습의 원칙은 영원한 원칙이며, 그 원칙을 바꾸는 것은 무질서를 조장할 뿐이다. 하루 아침에 브라만이 수드라가 되고 수드라가 브라만이 되는 혼돈 상태를 한 번 상상해보라."

뭔 또라이 같은 소리냐구요? 글쎄요? 이 말씀을 하신 분은 바로 위대한 영혼 Mohandas Karamchand Gandhi(1869.10.2~1948.1.30)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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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독립의 아버지들 중에 한 분인 이 분, 힌두경전들 중에 하나인 <바가바드 기타>에 주석을 달고 강의를 했을 정도로 독실한 힌두교도였다는 사실을 알면 뭐 그렇게 놀랄 사실은 아닙니다.

그런데 네팔 이야기를 하면서 왜 카스트 이야길 하냐구요? 카스트는 힌두교에만 있는 겁니다. 네팔 인구의 80.6%가 힌두교도이며 2006년까진 '국교'로 힌두교를 지정하고 있었던 나라니까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죠.
 
인도보다 더 한 상황일 수 밖에 없는 건, 저런 말을 하던 간디가 카스트 문제에 있어서 생각을 아예 바꾸게 만들었던 암베트카르(Bhimrao Ramji Ambedkar,1891.4.14~1956.12.6) 와 같은 불가촉천민 출신이 네팔 정치사엔 등장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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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베드카르는 인도의 초대 법무부 장관이며 동시에 인도 헌법의 제정자였던 만큼, 카스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도 헌법에 사회의 각 부분에 불가촉천민을 위한 자리를 '할당'하도록 한 Reservation System을 헌법에 도입해버렸기 때문이죠.

사실 이 사람이 높이 평가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인도 헌정의 기초를 만들었다는 것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삶도 실제로 바꿨기 때문입니다. 나렌드라 자다브, 인도중앙은행에서 수석경제보좌관으로 근무했으며 푸네 대학의 총장인 그의 부모님과 같은 사람들이 대표적이죠. 작년에 우리말로 번역되어 2007년 인문사회과학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신도 버린 사람들>은 사실 그의 부모님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Baba Saheb(Sahib로도 씀)이라고 불렀던 사람이 바로 암베드카르니까요. 인도어로 바바란 '아버지'를, 사히브는 'Sir'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 '아버님'으로 불렸던 셈입니다.

"우리의 헌법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 헌법은 유연성이 있을 뿐더러 평시, 전시를 막론하고 인도 국민을 하나로 단합시킬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지나고 있습니다. 만약에 새로이 제정된 헌법 아래서 국정이 난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헌법이 나빠서가 아니라 헌법을 운용하는 사람들이 사악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을 자신있게 할 수 있을 정도로 불가촉천민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싸웠던 암베르카르 조차 죽기 2달 전에 10만명의 불가촉천민들과 함께 불교로 개종합니다. Reserve System으로 카스트 제도를 어떻게 해서든 넘어가고자 했던 이들의 바람과는 달리 불가촉 천민에게 '할당된 숫자'조차도 체우지 못하는 상태로 이 제도가 운용될 수 있도록 집행에의 단서조항들을 꾸준히 추가시켜왔으니까요.

이런 위대한 인물 조차 없었던 네팔의 상황. 짐작하실 수 있으실랑가요?

2) Mao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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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o Zedong(1893.12.26~1976.9.9)

붉은 중국을 만들었던 장본인, 그리고 권력을 놓기 싫어 자기 마눌과 부하들을 시켜 중국을 10년동안 문화대동란의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버린 이 아저씨... 지금 중국 공산당 지도부들의 입장에선 참 이중적인 느낌이 들 수 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죠. 뭐 관운장과 같이 조상신으로 모셔진다니 문화혁명 10년의 아수라장도 바꾸지 못한 것들이 꽤 많은 셈입니다. 암튼... 중국에선 조상신 정도의 취급 정도를 받고 있는 이 아저씨가... 네팔에서 소혼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아보려면... 다시 인도로 가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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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2100미터, 시원하기 그지 없지만 함 올라가려면 7시간(70키로밖엔 안되는 거리를!)이 걸리는 Darjeeling. 요기서 네팔로 건너가라면 필히 지나갈 수 밖에 없는 마을이 하나 있습니다. Nakshalbari라는.

1960년대말, 이 마을에서 대규모의 소작쟁의가 발생됩니다. 그리고 이 쟁의를 지원하기 위해 Kolkata대학을 비롯한 일군의 지식인들이 참여하지만... 처절하게 진압당하고 말죠. 그리고 벌어졌던 일은 1980년 5월 29만원 논네를 비롯한 일군의 군발스들이 정권을 장악하겠다고 광주를 피바다로 만들어버렸을때 우리나라 대학에서 벌어졌던 것과 똑같은 일이었습니다.

뭔가 이념이 필요하다... 는 것이었죠.

그때 그들이 선택했던 것이 바로 중국식 사회주의, 바로 마오이즘이었습니다. 인도에서 왜 마오주의 반군들을 Naxal이라고 부르는지... 이해되시나요? ^^;; 이들이 마오주의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중국혁명 당시의 중국 농민들의 상황과 인도 농민들의 처지가 그렇게 차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수확한 곡물의 80%를 지주에게 가져다줘야 하기에 최대한 땅을 많이 빌릴 수 밖에 없고... 경작지는 개인이 경작할 범위를 넘어가니 불가촉천민들을 농업노동자로 쓰는 현실... 1달러 미만으로 하루를 살아야 하는 이들의 삶이라는게... 끔찍하죠.

문젠 얘네들이 晝戰夜讀하며 마오주의를 학습하기 시작한 바로 그 즈음에 이들의 총을 쥐었던 West Bengal주의 정권이 공산당으로 넘어갔고... 정권을 잡자마자 이들은 토지개혁부터 진행하게 됩니다. 이 동네에선 문제가 해결되었던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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낫과 망치, 그리고 West Bengal의 상징인 호랭이... 바로 West Bengal 공산당 깃발입니다.

하지만 인도 다른 지역의 농민들의 처지는 별반 달라질게 없었죠. 그래서 West Bengal의 옆 주, 동시에 가난한 인도에서도 끔찍하게 가난한 Bihar지역으로 흘러들어가게 됩니다. Naxal이라고 통칭하지만 사실 얘네들은 두 그룹입니다. 하나는 그룹은 MCC(Maoist Communism Centre, 마오이스트 공산주의 센터)로, 지금까지 설명한 그 그룹이고... 또 하나는 1980년대 고등학교 선생이 콘다팔리 시타라마이아흐가 세운 PWG(People's War Group, 인민의 전쟁 그룹)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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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턴 단상 위의 이 아저씨가 등장할 차례입니다. Prachanda. 네팔 마오주의자들의 리더이며 동시에 네팔인민해방군(People's Liberation Army)의 총사령관.

네팔은 1990년까지 절대왕정이었습니다. 20세기에 절대왕권이라니 뭔 시대착오...? 라고 하실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역사를 함 보죠...

  •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
  • 미국과 소련의 이해에 따라 분리통치. 한쪽엔 친미정권, 다른쪽엔 친소정권 수립
  • 내전 발발. 주변 나라들의 참여로 확전. 최소 450만명에 달하는 사상자 발생.
  • 휴전상태. 군사적 긴장상태 유지.
  • 민주화 요구 시위 발발.
  • 식민지시절 점령국의 군인이었던 자가 군사쿠데타로 정권 탈취
  • 18년간 장기 집권. 종신집권을 위해 헌법 수정.
  • 대통령, 측근에 의해 총격 사망.
  • 군사쿠데타 발발.
  • 민주화를 요구하는 한 도시를 포위 공격하여 민간인 학살
  • 헌법 수정하여 체육관에서 대통령 당선
  • 대통령 직선제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전국 규모의 시위 발생
  • 집권세력의 제 2인자를 내세워 대통령 직선제 요구 수용하고 재집권
  • 2개 야당과의 합당을 통해 거대여당 형성
  • 변절한 야당지도자가 대권 승계
  • 외환위기로 IMF 관리체제

친구가 정리한 대한민국사입니다. 뭐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들과 별루 다를 것이 없는 히스토리졉. 실제 헌법 자체가 민주주의적인 꼬라지가 된게 1987년 10월에 개정된 것이었으니까... 이 나라를 두고 '후진국' 어쩌구 하긴 좀 멋적을 수 밖엔 없습니다.

암튼... 1990년에 다당제를 도입하고 입헌군주제로 전환하게 되었는데요... 이때 생겼던 정당들이 통일공산당(CPN-UML), 네팔국민회의, 좌파전선, 네팔농민노동자당, 인민전선, 네팔스드브하바나당... 등이었습니다.

단상위의 저 아저씨. 원래는 공산당 소속이었습니다. 1986년엔 서기장의 자리에까지 오르죠. 그러나 1990년, 왕이 일종의 유화조치를 취하던 그 즈음에 전면적으로 비합법 투쟁의 깃발을 들어올리고... 1996년 2월 4일. 40개 요구사항을 발표하며 이를 즉각 수락하지 않는다면 바로 '인민전쟁'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합니다. 비합법활동을 하던 즈음부터... 바로 위의 인도 마오이스트들과 연결이 되죠.

요구사항들은 토지개혁, 군주제의 완전 폐지, 공화정 실시, 인도와의 군사협정 폐지(네팔에 뭔 일이 터지면 인도군은 인도군 총사령관의 판단에 따라 바로 군대를 투입할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적 경제개혁, 다국적 기업 반대... 등등이었습니다.

그때 네팔 정부의 반응은...?

"너넨 또 누구니?" 였습니다. ㅋㅋ

그 후, 이들은 인민전쟁을 선포하게 되는데... 여기서부터 아주 골아픈 사태로 연결되게 됩니다.

네팔 정부는 이들을 정치세력으로 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처음엔 경찰을 투입했는데... 위에서의 독촉이 심해지니까 과잉진압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민심이 마오반군쪽으로 쏠리게 됩니다. 이게 혼란을 거듭하던 중... 미국이 개입하게 됩니다.

9.11 이후 전세계적인 반테러 전쟁을 선포한 부시는 네팔 반군 역시 테러리스트로 정의합니다. 그러곤 네팔정부에 군사 지원을 해주죠. 이미 군이 투입되어 있던 상태에서 이러한 미국의 지원은 사태를 엄청나게 악화시키게 됩니다. 영국군이 2차 대전 당시 개발해 거의 80년대까지 사용했던 스탠 기관단총과 역시 2차 대전 당시에나 썼을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던 네팔군에게 성능 좋은 미제 무기는 대량학살이라는 결과로 이어졌거든요.

이 결과...? 헌정중단이 심심찮게 벌어지다가...2005년 말에 계엄이 선포되었지만 한번 잃은 민심은 돌이킬 수 없는 법이죠. 결국 2006년 4월 23일 왕이 절대왕정 폐지와 제헌의회 소집을 약속하고 4월 26일 마오 반군과 왕정은 휴전을 결의하게 됩니다.

그 이후... 엔 제헌의회를 만들기 위해 임시국회를 소집했죠. 총 329개 의석 중에서 마오이스트들이 가지고 있는 의석은 83석입니다. 이후 네팔 마오이스트들의 활약을 알고 싶으시다면 프레시안의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쫌 쓰겠다고 했던 것이 걷잡을 수 없이 길어지는군요. 아무래도 여기서 정리하고 나머지는 나중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2008년 3월 6일 목요일

West Wing이야기1, God bless America!

아마 작년 9월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TV자체를 PMP에 연결된 비됴기계로 쓰기 시작했던 거이 말이졉. 뭐 딱히 보는 프로그램들도 몇 안되었던데다 현 대통령의 아슷흐랄한 행각과 전 대통령의 비슷한 행각들을 보면서 올라가는 스팀 자체를 어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뭐 현 대통령과 내각의 엽기 행각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그 엽기 내공을 자랑하던 바, 인수위 두 달의 현기증은 그야 말로 예고편에 불과했다는 것을 실감나게 만들어주더군요.

요즘은 경비행기 조종에 푸욱~ 빠져 있던 진거사가 이 꼴을 두고 일갈을 했던 거이 거의 한 달 전이고 보면... 그 다음에 이어질 이야기들은 더 말할 필요도 없겠죠. 가장 나은 양반이 이 모양이었고, 뭐가 뛰니 뭐가 뛴다고 골방에 처박혀 갈 날이나 기다리고 있어야 할29만원 논네까지 가세를 하더군요.
 

이 갑갑한 현실을 보고 있느니 영어공부나 할 겸... West Wing을 한 다섯 번은 반복해서 봤던 것 같습니다. 총 7개 시즌에 시즌당 20편 내외... 거의 154시간 분량을 그 동안 다섯 번 반복해서 봤다는 이야기는... 주말엔 완전폐인모드로 모니터로 이 드라마만 보고 있었다는 이야기이자, 동시에 출퇴근 시간에 들고 다니면서 보는 PMP에서 가장 오래 돌아간 넘이 이 넘들이란 뜻이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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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st Wing. 1999년 시작해 2006년까지 장장 7년동안 NBC에서 방영되었던 이 시리즈는 2번의 에미상 수상을 비롯해 총 87개의 각종 상들을 싹쓸이했던 명작이기도 합니다. 민주당 골수 지지자로 대선 때마다 그 이름을 보이는 Aaron Sorkin의 정치적 지향점이 상당히 강하게 나타나죠. 1999년부터 2006년에 이르는 7년의 세월동안 총 155개 에피소드의 각본을 직접 썼고 제작까지 맡았으니(제작은 1999년부터 2003년까지였습니다) 뭐...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백악관을 다루고 있는 만큼 미공군 1호기는 심심하면 등장하는 수준이니.. 스케일도 장난이 아니죠. 자기 시리즈들을 가지고 있는, 나름 한 끝발한다고 하는 배우들이 총출동하고... 그들이 쏟아내는 대사들은 세익스피어에서부터 동네 얼라들의 양아식 말투까지 포괄하니 작가들의 방대한 지식에 감탄사만 나올 뿐이죠.

거기다 7년간의 대통령은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사람이라니... 뭐 골수 민주당원이 그리는 이상적인 미국사회가 어떤 모습인지 감상하는 것도 꽤 재미가 쏠쏠합니다.

문젠... 이 '이상적인 대통령'이 남의 나라와는 심히 사맛디 아니한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는 순간부터, 요거 할말이 많아집니다.

그래서... 그냥 미드 감상기라기 보단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그리고 왜 조사이아 바틀렛 행정부가 가장 미국 민주당의 이상적인 정부인가를 두 번에 걸쳐 정리해볼까 합니다.

옛날 영국에 버크(Edmund Burke, 1729.1.12(?)~1797.7.9)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대한민국의 정치세력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보수주의자'라고 하는 그 '보수주의(conservatism)'이란 말을 만든 장본인으로 보수주의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정치사상가, 동시에 정치인입니다.

'보수주의'라는 걸 만든 분 답게, 자신이 목도한 프랑스 혁명에 대해 상당히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죠. 그의 책 <프랑스 혁명론. Reflection on the revolution in France>(1790)에서 그는 “어리석은 군중과 전통을 파괴하는 무책임한 이론가들의 폭거”라고 했다니까.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독일 트리어지역에서 발생한 종말론의 창시자인 털보아저씨(Karl Marx)는 이걸 두고 “죽은 세대의 해묵은 유산이 산 자의 두뇌를 악몽으로 짓누르고 있다.”라고 비판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프랑스 혁명에 대해 날선 비판을 했던 이 분이 정작 미국의 독립전쟁은 적극적으로 옹호했었다는 겁니다. 미국이 독립선언을 하자 진압군 출동을 명한 조지 3세더러 ‘반란은 영국의 국왕이 일으킨 것이다!’라며 거꾸로 왕을 비판합니다.

요 포인트. 쫌 햇갈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구요? 제가 봤던 세계사 교과서에서 '미국의 독립전쟁'과 '프랑스 대혁명'은 똑같이 인류의 위대한 진보의 한 걸음이었다는 평가를 했었고... 그걸 외워서 토해놔야 점수 받을 수 있었거든요?

"사회는 실로 그 구성원들 사이의 계약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협력의 목표는 단시일내에 달성되는 것이 아니며 동시에 그 공조관계라는 것도 현재인의 계약관계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조상들과 장래에 태어날 후손들이 소유하는 계약관계이기도 한 것이다... 떠도는 일시적인 기분에 의하여 사회구조에 변혁을 가하려 한다면 세대와 세대 사이를 이어주는 역사의 연결고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한여름의 파리보다 나을 것이 전혀 없다."

이 아저씨의 말씀을 쫌 도식화시켜서 이야기하자면... 덕성이라는 넘은 시간이 지르면 타락하는데, 이 타락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선 추억이라는 과정이 필요하다.. 뭐 이런 겁니다.

당시 영국을 지배하고 있었던 휘그 과두정과 박터지게 싸우고 있었던 이들은 고대 로마 시대의 공화적을 가장 이상적인 정치체제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미국의 독립운동 세력에게 미쳤던 영향은 엄청났었죠. 그러니 휘그당 중도파의 핵심 인물이었던 로킹엄 후작 2세 찰스 윗슨 웬트워스(Charles Watson-Wentworth, 2nd marquess of Rockingham, 1730. 5. 13~1782. 7. 1)의 개인 비서였던 버크가 왜 이 말을 했는지 이해하실 수 있지 않을까요?

이들의 공화주의는 1인이 현명하게 통치하는 군주정과 소수가 사심 없이 공익을 위해 봉사하는 귀족정, 그리고 다수가 올바로 지배하는 민주정을 혼합하는 형태였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이상향'은 절대적 권한을 가지는 대통령과 임기 6년에 2년마다 1/3씩만 선거함으로써 안정성을 확보하는 상원, 그리고 매 2년마다 몽땅 다 뽑는 하원을 만드는 것으로 미국의 헌법에서 구현되었죠.

여기에 이들은 이러한 체제 자체를 반대하는 이들이 집권해 이 체제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하도록 헌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연방헌법은 다른 나라들처럼 몇 차 헌법이라고 아예 문항들 자체가 날아가고 신설되는 형태가 아니라 '상황이 변화면 수정'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게 현실과 심히 사맛디 아니하다는 건 이들이 선거부 작성을 위해 인구 센서스를 전수조사를 할 것이냐 통계로 처리할 것이냐를 두고 논쟁을 벌이는 에피소드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죠. 선거를 할 수 있는 것은 '노예'를 제외한 자유인들이었으니... 실제 미국의 인구가 아니라 '자유인'들의 숫자를 세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막장경쟁

문화일보가 신정아씨 누드 사진이라는 걸 공개했었을때... 참 얘네들 어디까지 갈려고 그러나 싶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중앙일보가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 또 한 건을 해주는 군요. 신문사들의 막장경쟁. 어디까지 갈지 그냥 지켜만 봐야 하는 걸까요?

2008년 3월 5일 수요일

네팔의 항공정비

오늘두 유입 로그를 보니 돌아가신 박형진 중령에 대한 것들이 많더군요. 뭐 헬기 정비불량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글을 밑에 써놓긴 했습니다만... 얘네들의 상황이 얼마나 안습인지에 대해선 좀 더 구체적으로 써놔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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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은 2006년 10월에 네팔의 트리듀번 국제공항에서 촬영한 겁니다. 사람들이 왜 서 있고, 누워 있냐구요? 방콕행 로얄네팔(지금은 네팔항공으로 이름이 바뀌었음)을 타야 하는데... 엔진이 이상하다고 8시에 떠야 하는 뱅기가 꼼짝도 안하고 있었거든요. 그리곤 쬐끔 기둘리라는 방송이 나오더니 도시락 가져다 주기에 그냥 앉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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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기 도시락인데... 안에 센드위치 하나랑 바나나 하나 들어 있더군요. 그걸 두 개를 먹고 나니까... 상하이에서 오는 로얄네팔 여객기가 착륙을 하더군요. 착륙하고 나서 기름차가 열심히 달려가는 걸 보고... 저게 뭐냐...?라고 쳐다봤더니만... 뒤에서 한국인 의사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얘네가 비행기 두 대를 가지고 국제선을 뛰고 있거든."

글씀다... 한 대가 고장나면 또 한 대가 기름만 넣고 바로 뜨는 시스템이었던 겁니다. 정비 제대루 하냐구요?

그 다음해인 2007년 5월, 네팔항공을 타고 방콕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습니다. 그런데... 이 넘의 비행기가 방콕 공항에 착륙하려고 할때 갑자기 엔진의 그 시끄러운 소리가 안 들리면서 떨어지는 느낌이 확~ 오더군요. 몇 초후에 다시 엔진소음이 들리면서 다시 떠올랐다가 착륙을 했는데... 순간적으로 들었던 생각은 "이렇게 가는구나"였습니다...

그럼에도... 다시 네팔을 간다면... 네팔항공 티켓을 다시 볼 수 밖에 없는게... 이게 제일 싸면서도 1년 오픈이라는 겁니다. 타이항공이 한 7~10만원 정도 더 비싸고 2개월 오픈이고, 대한항공은 거의 20만원 정도 더 비싸면서 2주 오픈이거든요. 일년 오픈짜리로 끊으면 네팔에서 미국 뉴욕 가는 비행기표 값이랑 근접해집니다.

국제선 여객기를 얘네들 방식으로 굴리면 쫌 많이 암담한 사태를 겪을 수 밖에 없는데... UN 헬기라고 뭐 달랐을까요?

지원 없는 마린

친구 녀석과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심다.

"어쩌다가 우리는 벌처나 발키리, 씨지탱크는 물론이고 매딕 지원도 없는 마린 신세로 총질해야 하는거냐...?"

요 며칠간 딱 그런 심정이었심다. ㅠㅠ

미드의 본좌 중에 하나인 <Band of the Brothers>에선 자기네들은 공수부대니까 항상 포위되기 마련이라는 이야길 합니다만... 제가 EZ중대도 아니고... 참 거시기 합니다요. ㅋㅋ

Be cool!

그게 아마 1977년이었을 겁니다. 국민학교(그땐 초등학교 아니었음!) 갓 입학한 넘이 1학기도 끝나기 전에 스페인행 비행기를 탔던게 말이죠. 원양어선 기지가 Gran Canaria섬의 Las Plamas에 들어섰지만, 그 지역 사람들에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존재감은 거의 없었습니다. 8살짜리 꼬마가 조국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던 경험이라고 해봐야... 식당에서 Made in Korea가 찍힌 포크와 나이프 정도였죠.

97년에 캐나다에 있었을땐 동네 꼬맹이들이 "야~ 너네 한국으로 돈 보내고 있다며? 우리가 좀 보태줄까?"라고 동전을 흔드는 걸 C8~!거리면서 쳐다봐야 했고... 영화 <Titanic>을 보면서 그 영화 만드는 데 들어간 돈이 당시 한국의 외환보유고의 1/10이었다는 사실을 머릿속에서 버리기 어려웠죠.

1970년대 중동에서 일하던 우리 아버지들이 피땀흘려가며 고생하다가 어쩌다 아시안컵 같은 곳에 한국 축구 대표팀이 왔을때 정말 눈물로 응원하던 그 심정, 그래서 쬐끔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슷한 정서를 가지고 어린 시절을 살았으니까요.

그러다가 몇 년전부턴 '한류'라는 말이 나돌기 시작하고 쎔쑹과 엘쥐 제품이 미드에도 슬금슬금 등장하기 시작하더니 어설픈 한국말들이 미국 드라마를 보다가도 종종 들리는 경험을 하게 되더군요. 그러고나서부턴 2006년에 싸커월드 게시판에 올라왔던 이 글... 참 뿌뜻한 마음으로 읽게 되었었습니다.

내가 Cool 하게 스위스를 기다리는 이유.
 
   
1) 1986년의 기억

당시엔 대통령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어른들에게 '잡혀간다'고 협박을 들을 시절.
멕시코시티에서 열리는 첫경기에 아르헨티나의 마라도나가 나왔을때 해설자가 말했다.

"우리는 차범근 선수가 있습니다."

차범근 선수는 공을 잡지도 못했다. 우리는 우르르 몰려 다니며 전반에만 3점을 먹었다.
박창선 선수가 골을 넣었을때, 나는 아버지가 담배를 비벼 끄며 하는 말씀을 들었다.

"아르헨티나 넘들을 방심해서 그런거야."

패배주의는 그렇게 심어졌다. 나는 여전히 일본 기업들의 광고판 일색이었던 멕시코시티의 그 경기장이 잊혀지지 않는다. 내가 대기업이라고 생각했던 삼성이나 현대, 심지어 금성 마저도 광고판이 없었다. 광고판 마저도 나를 좌절하게 만들었다.


2) 1990년의 기억
황보관은 이미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경기에서 멋진 프리킥 골을 보여주었다. 때문에 스페인과의 경기에서도 한껀 해 줄 줄 알았다. 결국 한껀 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번에도 말했다.

"조선놈들은 다리가 짧아서 안된다."

그런데 들어갔다. 당시 월드컵 베스트 골 중에 하나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어이없는 3전 전패. 쓸쓸했다.

광고판에서 제일 잘 보이던 것은 "Canon과 JVC"였다.

3) 1994년의 기억

스페인과 2:2 무승부를 기록했다. 대학 도서관에 들어가니 예비역 형들이 스페인 한명 퇴장 안됬으면 무승부는 어림도 없었을 거라고 했다. 맞는 소리 같았다. 축구는 늘 그랬다. 우리가 무언가 해내면 패배주의를 합리화 시켜주는 그 무엇인가가 항상 존재했다.

4) 1998년의 기억
최용수가 정말 세계적인 스트라이커인줄 알았다. 그런데 한거 아무것도 없었다. 하석주는 세번째 월드컵. 복받은 사람이다. 적어도 한골을 넣지 않았는가. 그런데 브랑코 그 Dog baby가 다리사이 볼 끼워넣고 점프하기 신공을 펼치며 우리 수비진을 유린하면서
"멕시카나 치킨"은 절대로 안먹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멕시카나는 절대로 안시켜 먹었다.

네덜란드전. 나는 나이키에서 4만원 주고 산 국대 레플리카를 입고 있었다. 가족들은 나에게 진정하라고 했지만 나는 진정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네덜란드 전이 끝났다. 할말이 없었다. 내 귓가엔 "조선놈은 어쩔수 없어..."라는 이명이 윙윙 거렸다. 힝딩크가 오베르마스에게 윙크를 보내는 장면은 평생 못 잊을 것 같다.

5) 2006년

2002년은 다 부질없는 '어제내린 눈'이다. 다시시작된 투쟁. 토고한테 지는줄 알았다. 근데 이겼다. 프랑스한테 지는줄 알았다. 근데 비겼다. 현대자동차는 최대 협찬사 중의 하나이고 경기장에서는 유럽애들이 삼성 모바일로 태극기 올리는 퍼포먼스를 사진찍는다.

고작 모여서 태극기나 흔들던 [번외자]들이었던 한국인들이 이제는 개최국 국민들보다 더 극성이다.

월드컵은 이제 우리판이다. 프랑스도 한국이랑 경기하면서 [심판판정]을 운운한다. 많이 컸다. 이것만 해도 기쁘다. 패배주의? 웃기네. 지면 어떠냐. 아르헨티나도 16강 못올라갈때가 많다.

옛날엔 사우디한테 지면 맨날 '오일 달러'이야기 했다. 모깃불 피워놓고 대청마루에서 모기장을 쳐 놓고 수박 먹으며 사우디에게 한골 두골 먹는 대표팀 경기를 본 사람들은 안다. 우리는 애당초 이정도 수준, 즉 세계에서 범용하게 싸울수 있는 수준이 되기위해 안달을 했다고. 이제야 겨우 '한국애들은 전자제품 잘 만들어' 라는 소리를 듣는 수준이지만, 예전엔 '한국 제품은 싸구려' 라는 패배주의에 물들어 있었다고.

조국? 대한민국? 웃기네, 학교다닐때 제일 많이 들은 이야기는 '반공'이었고 '새마을 운동'이었다. 밤에는 통행금지가 있었고, 경찰이 치마 짧다고 자 들고 다니면서 여자들을 연행하던 이상한 나라였다. 메이지 유신이 일본을 살린 구국의 결의 였다며 '유신체제'를 선포하는 대통령이 있던 이상한 나라였다.

6) 이제 이만하면 우리는 충분히 통해.

우리는 세계에서 말하는 '보통 국가'가 되기 위해 투쟁했다. 맨날 한국이랑붙으면 승점 먹고들어가던 나라가 아니다. 프랑스 같은 나라한테 3점 정도 먹고 들어가던 '깔아주는 나라"가 아니다. 젠장, 이정도면 어때?

프랑스랑 비기던 날 우리 아버지가 전화했다.

"우리 16강 가겠네?" 나는 아직도 아버지가 했던 말들이 귀에 남아있다. '조선놈이... 조선놈이...'

패배주의는 가라. 스위스랑 원없는 경기 한번 해보면 끝이다. 살아남으면 좋은거고, 터미네이트 되면 터미네이트 되자. 썅, 우리가 원했던게 월드컵 우승인가? 우승 후보들도 3전 전승 조별리그 돌파 못하는 판국에 우리가 승점 4점이다. 적어도, 깔아주고 들어가던 예전의 약체는 아니다.

우리 아버지들은 '약체'소리, '가난한 조국' 소리 듣기 싫어서 열심히 살았다.
이제 우리는 '강호'소리, '최고 국가' 소리를 들으려고 열심히 산다.

이정도면 됬다. 욕심도 없다. 그저 스위스랑 원없는 경기만 해다오.

어느 월드컵부터 우리가 경기 리드하면서 볼 돌리는 한가한 강호가 되었나?
어느 월드컵부터 우리가 도박사들에게 20위권 배당을 받았나?

이제사 조국은 '열등'을 벗어나 '평범'을 성취했다. 이제 태어날 우리 아들대에는 정말로 엠블럼 위에 '별'좀 달수 있지 않을까?  하기사, 아시안컵 나갈땐 엠블럼 위에 별 두개 달고 나가도 되잖아?

우리 아버지 살아계실때 '별'좀 달면 더 좋은데...

스위스전 끝나고도 아버지한테 전화좀 받았으면 좋겠다. 우리아버지, 아르헨티나 경기 끝나고 축구 두번 보면 사람이 아니라고 했던 우리아버지가 이제 '보통 국가'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도록.

가끔은 짜증난다고 하더라도... Cool할 수 있다는 걸 한 번씩은 되세길 필요가 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박형진 중령이 탔던 Mi-8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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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줏어놨던 이미지를 여기서 쓰게 되네요. 위의 이미지는 이전에 유용원의 군사세계에 올라와 있있었던 넘입니다. 전 세계 헬리콥터들이 대충 어느 정도의 사이즈를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라 싶어 이미지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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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8은 위의 두 그림으로도 확인하실 수 있겠지만... 작은 기종은 아닙니다. 오늘 유입 키워드를 보니 박중령이 어떤 헬기를 탔었는가를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아 이 넘에 대해 쬐끔 설명드릴까 합니다.

Mi-8의 나토 코드명은 Hip으로 수용용 헬리콥터입니다(건쉽으로도 개조가 가능합니다). 1961년 7월 9일 프로토타입이 처음으로 선을 보였는데... 이땐 엔진이 하나였다네요. 그랬던 걸 다음해에 엔진을 두 개를 얹었고, 구 소련 공군에게 인도가 되었던 것은 그로부터 좀 지난 뒤인 1967년이었다고 합니다. 이때 Mi-8이라는 이름이 붙었구요.

뭐 구 소련 공군은 이 넘의 성능에 꽤나 만족했었는지 다양한 형태의 베리에이션을 가하는데요... 쬐끔 엽기적인 넘은 Mi-8TG입니다. LPG가스가 연료랍니다. ^^;;;

역시 눈에 띄는 변형기종은 Mi-8Tm Mi-8TVK, Mi-8TBK로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각각 나토 코드명이 Hip-C, Hip-E, Hip-F인 이 녀석들은 건쉽으로 개조된 넘들입니다. 전자전기로도 변형해서 사용하고 있구요...

만든 넘들이 다양하게 변형해서 쓰는 만큼 꽤 많은 나라들이 이 넘을 가동하고 있는데요... 이걸 쓰고 있는 나라들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알바니아, 알제리, 앙골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벨라루시, 방글라데시, 부탄, 보스니아 헤체고비나, 불가리아, 부르키나 파소, 중국, 크로아티아, 쿠바, 체코 공화국, 지부티, 구 동독, 이집트, 에스토니아, 이디오피아, 핀란드, 가나, 헝가리, 인도네시아, 인도, 이란, 이라크, 카자흐스탄, 케냐, 라오스,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마케도니아, 마다가스카르, 말레이지아, 몬테네그로, 몰디브, 말리, 멕시코, 몰도바, 몽고, 모잠비크, 미얀미, 네팔, 니카라과, 북한, 파키스탄, 페루, 폴란드, 루마니아, 러시아, 세르비아, 스리랑카,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수단, 시리아, 타지키스탄, 우간다, 우크라이나, 우즈베키스탄, 미국, 베트남, 베네주엘라, 예멘, 잠비아... 등이 군용목적으로 사용한답니다.

아... 미국이 이걸 쓰는 이유는... 특수전 부대의 훈련용입니다. 워낙 많은 나라들에서 이걸 쓰고 있으니 노획을 하든, 현지에서 조달을 하기가 쉽다고 판단하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추락원인에 대해 '노후기종'이라서 그렇다...라고 이야기하는 곳들이 좀 있던데... 기체노후의 문제라기 보단 정비불량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봅니다.

요즘 같은 갈수기엔 전기가 하루에 8시간 이상씩 나가버리는 나라고, 최근엔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떠라이 지역(인도 접경지역으로 치트원과 룸비니가 이쪽의 관광명소들입니다)에서 길을 막는 바람에 석유와 가스 공급이 끊겨 가격폭등이 일어나... 네팔 전체가 아수라장이 되었다보니... 제대로된 정비를 하긴 좀 어렵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유랑하는 연인들, 첨밀밀

한 시대를 열었던 매체의 글쟁이에서 컨텐츠 기획자로, 마케팅 기획으로... 그러다가 다큐멘터리 팀의 행정을 하고, 지금은 사회단체의 간사를, 좀 있으면 꽤 큰 사업을 중계하는 에이전트를 하게 되네요. 이력서 치곤 참 난잡하기 그지 없는 셈입니다.

가끔 불안 때문에 제 자신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경우들도 많았던게... 컨턴츠를 가지고 있는 업체에서 기획을 했던게 아니라 그걸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고, 이제 서비스 시작하는 넘을 마케팅하러 다녔으며... 개발도 되지 않은 ASP(Application Servie Provider, 우리말로 프로그램 임대업)를 팔러 다니기도 했었죠.

캐나다에서 만나 지금까지 계속 메신저나 메일을 주고 받고 있는 대만친구는 저의 이런 삶의 궤적을 두고 流浪이라고 이야기하더군요. 그 친구랑 그 이야기를 하던 즈음에 봤던 영화가 첨밀밀이었는데... 네팔에서 그 영화평 썼었던게 있었는데...

그거나 함 올려보렵니다.




 
인간의 기억이라는 것은 참 웃겨서 시간이 일정 이상 흘러버리면 '본 것'과 '못 본 것'의 간극까지 섞어버리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사람 얼굴에 대한 기억은 그나마 이유라도 있지요. 사람들이 얼굴을 기억하는 방법은 얼굴의 특징적인 부분들을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나머지 부분들은 대충 두리뭉실한 형태로 기억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다른 인종일 경우엔 얼굴 특징들 자체가 '섞이는 바람'에 다른 특징들만으로 사람의 얼굴을 구분하게 됩니다.
 
그러나 좀 더 골때리는 경우는 우짜다가 '보지 못했던 영화'들도 가끔은 '본 영화'리스트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본 영화'들이 '못 본 영화'의 리스트에서 헤매는 경우들입니다. '못 본 영화'라고 해서 DVD를 돌렸을 때 영화 줄거리가 기억나는 경우라면 그나마 낫지요... 못 본 영화였는데, 지금까지 본 줄 알고 있었다가 줄거리는 물론이고 장면 하나 기억나는 것이 없더라는 걸 느끼게 되면 '뇌의 노화'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8개월 가깝게 끊었다고 하더라도 거의 20년 가깝게 피운 담배와 그 즈음부터 지금까지 연속선에 있는 알콜 섭취등에 대해 절라리 고민하게 되는거죠. ㅠㅠ
 
<첨밀밀>도 이 경우에 해당되는 영화였습니다(이런 영화가 몇 편이냐고 물어보시면 저두 할말 없심다. 그거 기억하고 있으면 이런 기억력 버그 벌써 잡았죠. ㅠㅠ). 아마 등려군의 노래가 워낙 익숙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중국 사람들이 '한 대륙'으로라면 몰라도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일본이나 우리에 비해 훨씬 그 '농도'가 떨어진다는 사례로 이 영화가 자주 들먹여져서 그랬던 것일 수도 있고... 당대 최고의 홍콩 배우들이었던 장만옥과 여명이 워낙 익숙한 배우들이라서 그랬을 수도 있지요...
 
삼시 세끼 꼬박 챙겨먹고 타멜 거리 밖을 절대로 벗어나지 않은 운동량을 두 달 가깝게 유지한 결과, 나날히 부풀어 오르고 있는 제 배와 비슷한 속도로 부풀러 오르고 있는 네팔 카트만두 분지의 보름달을 보면서 왠지... 이 영화 봐야겠다는 생각이 있어서 돌렸는데... 여러가지 생각이 들더군요.
 
이 영화가 개봉한지 1년 후, 전 Canada Vancouver에 둥지를 틀겠다고 덤비고 있었습니다. 그때 만난 여러 사람들 중에서 그래도 때 되면 서로 인사하는 사람들이 몇 있습니다. 한동안 일용할 양식을 공급했던 넘도 있고(이 친구, 자기가 반대한 일을 추진한 사람들은 도망간 상태에서 뒷 수습하느라 고생중입니다), 대체로 영어 실력이 backslide할 즈음이면 영문 타이핑 속도를 이빠이 높여주는 몇몇 외국 친구들도 있지요. 그 중에 한 명인 대만 친구가 네팔 카트만두에서 추석 보내게 되었다고 이야기했더니 제 가슴에 이렇게 못을 박더군요.
 
"i am not sue if u can read the words. '流浪'.  i think that is Ur destiny"
 
무척 더워지는 순간이었습니다. ㅠㅜ
 
그런데...
 
저 말이 이 영화와 묘하게 매칭되더군요. "대륙 사람들이 홍콩으로 넘어오고 있었을 때, 홍콩 사람들은 다른 나라로 떠나고 있었다."는 이야기나 "이젠 고향으로 가야 돈 벌어"라고 뉴욕에서 불법체류 신분을 가까스로 갱신한 장만옥에게 이야기하던 관광객의 말이나... 제 기억으론 <첨밀밀> 역시 홍콩이 반환되기 전, 홍콩 사람들 스스로가 불안감을 많이 내보이던 시절에 만들어진 영화였던 까닭에 영화 곳곳에 박혀 있는 비유나 상징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들을 꽤나 많이 읽었던 것 같습니다.
 
가장 많이 들었던 사례가 '고향의 여자' = '중국본토', '돈 벌기에 정신 없는 여자' = '현대 홍콩인, 혹은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홍콩인' 뭐 이런 식으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의 케릭터를 해석하는 것이었죠. 특히 뉴욕에서 두 연인이 만난다는 것 자체를 '본토놈들 믿지 말고 이민가라'라고 선동하는 내용이라고 해석들을 많이 했었던 것 같구요. 뭐... 한때 아시아의 금융기지였던 홍콩의 쇠락(이른바 '본토'로 많이 넘어간 상태죠)을 보는 입장에선 그리 틀리지 않았던 예언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유랑하는 이들이 자신의 인연을 다시 찾아가게 된다는 건 아무래도 진가신 감독의 바램에서나 가능한게 아닐까요?

ps. 등려군이 부른 첨밀밀을 동영상으로 붙입니다.

[Flash] http://serviceapi.nmv.naver.com/flash/NFPlayer.swf?vid=63D05060046B5311E2F4539917A6A68D3809&outKey=72ffe9815f21a99d0823b1ea7797346335b6a05c0671f62e3f0a6d3f8571e3f0f64a65baa58c52512a6c08be851aa64b